목차

  1. 기독교내 여성 문제 
  2. 여성독립운동가, 차미리사
  3. 1920년대 여성교육 
  4. 여성의 리더십
  5. 여성의 노동력 
  6. 조선 여성들의 배움  


여성의 권리 

1920~30년대에는 여성의 불만이 증가하던 시기였다. 여성의 문제는 기독교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성들은 꾸준히 선교를 해왔다. 선교사의 64%가 여성이었다. 선교사들중에서 여성의 비중이 높았기에 여성도 목사직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목사직을 인정했다 해도 남성과 같은 자격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여성에게 연회자격을 주지 않았고 활동을 널리 하지 못하게 지역에 한정시켰다. 심지어 북장로교에서 여성이 장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930년대부터였다. 그만큼 여성의 위상이 낮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신학교육과 같은 영역은 남자들이 자기의 영역이라 생각하였기에 여자들을 제외시켰다. 여성 선교사들의 권리가 아무리 낮았더라도 그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다. 그것은 바로 전도부인 때문이었다. 전도부인의 역할은 다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성서와 전도책자를 판매하며 전도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전도부인은 총 1천 2백명에게 전도했으며 감리교에 속했던 여성은 60%, 장로교는 17%, 성결교는 11%였다. 감리교에 눈에 띄게 여성이 많았다. 그로인해 감리교 여성들은 신학교육을 빨리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도부인은 대부분 낮은 계층 출신이었고 경제적 형편이 어려웠기에 기초적인 교육만 받았었다. 그렇기에 그녀들이 하는 일 모든 것들이 존중 받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전도부인들은 인정해주었으면 하는 요구사항들이 많았다. 이 요구사항들을 털어놓으며 인격을 존중하고 차별을 없애주고, 전도부인과 동등히 대해주고 일의 책임을 맡겨달라고 요구하였다. 당시 전도부인과 대비되는 여성이 있었다. 바로 신여성이었다. 신여성은 교육을 받고, 독립적이고,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대표적인 신여성에는 김활란, 박인덕, 임영신, 김마리아 등이 있었다. 이들은 여성교육과 해방, 민족운동에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여성 역할의 중심은 가정이었기에 선교학교에서도 기독교적인 가정에 대해 강조하였다. 1930년에는 국가에 희생하는 여성들을 강조했기에 그러한 교육이 더 강화 되기도 했다. 한국교회는 남녀평등을 말했지만 실질적으로 교회의 활력은 여성에게 달려있었다. 


여성독립운동가, 차미리사 

차미리사는 1879년 8월 21일 ‘섭섭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녀는 열일곱에 딸을 낳고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어 ‘미리사'라는 세례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사별한 남편의 성을 따 ‘김미리사'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차미리사는 23살의 나이에 중국으로 떠나게 된다. 이때 많은 마음고생을 하면서 열병을 앓았다. 중국에서 유학을 하다가 미국에 가서 교육운동, 사회활동, 독립운동, 언론 활동 등을 활발하게 펼쳤다. 많은 활동들을 함으로 스캐리트 신학교에 32살에 입학했다. 배화학당에서는 서양 근대문명을 경험한 능력있는 교사를 찾고 있었다. 미국 감리교 외국 선교부는 차미리사의 신앙심과 사회봉사 활동을 높게 평가하여서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배화학당은 개신교 학교였기에 스캐리트 신학교 출신의 교사들이 여러명 와 있었다. 차미리사는 민족 독립의 의지와 삶의 희망을 확고히 심어주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였다. 남궁억과 차미리사가 그 일에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차미리사는 학생들에게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고 사감으로 활동하며 학생들이 자립심과 민족의식을 깨우치게 하는 역할도 톡톡히 하였다. 배화학당에서는 훗날 조선의 어머니로서 자질을 익힐 수 있는 교육을 하였다. 차미리사는 학교생활에만 매진하지 않고 방과후에 밤늦게까지 여성계몽운동에 헌신했다. 차미리사는 3 ⋅ 1운동이 시작되자 본격적으로 여성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야학을 열었다. 그녀의 교육대상은 구식 가정부인들이었다. 구식 가정부인들은 엄청난 압박을 받으며 남편의 뒷바라지만 하며 살던 사람들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배화학당 선교사들은 말했다. “교육사업은 우리가 할테니, 사감으로 들어가게나.” 그에 차미리사는 이렇게 반박했다. “나는 미국 선교부에서 조선으로 가서 일하라는 하나님의 사명으로 우리나라에 왔소.”라고 하며 야학 활동을 계속 해나갔다.  1920년대에 배화학당의 분위기가 상당히 악화되어있었다. 3 ⋅ 1운동 1주년을 맞아 학생들이 언덕에 올라가서 외친 “대한독립 만세!” 때문이었다. 그에 놀란 형사대는 학교로 와서 한명 한명 심문하였다. 형사대가 벌을 줄 것을 학교에 주장하자 스미스(Smith) 교장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선교부의 파견을 받아 한국에 온것이 교육의 목적이고 정치와 아무 관련이 없는데 나라가 독립이 되길 원해서 만세를 부른 것에 처벌 할 수 없소.”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스미스 교장은 더 이상 교장으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경찰은 만세사건의 배후로 차미리사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차미리사가 야학활동을 계속하자 스미스 교장에 이어 새로 오게 된 교장인 에디스(edus)(영문명) 교장이 “사감과 야학 둘중 하나만 하는게 좋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하였고, 차미리사는 배화학당을 떠나고 여성교육운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1920년 여성교육 (한국 기독교 여성운동의 역사)

1920년 초에 한국 여성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1910년에 일제로 인해서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그런 모습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을 기독교 여성들은 참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 앞에 회개기도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믿었고 열심히 기도하였다. 사경회, 성경반 등이 있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한국의 여성들을 새로운 삶으로 이끌게 되었다. 3 ⋅ 1운동 이후 항일여성운동단체들이 하나둘 조용히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항일여성운동단체들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여자복음회, 독립여자부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 단체들은 항일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3 ⋅ 1운동으로 잃은 주권을 남자들만 되찾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도 찾아야한다고 여기며 더욱 더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그러한 생각에 기독교 여성들은 상해임시정부를 후원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쟁에 바로 참여할 수 있도록 접십자장과 결사장을 두고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 활동이 비밀리에 결성된 단체 였기에 1년도 안되서 체포되어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기존에는 여성과 남성이 똑같은 주권을 가졌으므로 민족운동에 앞서야한다는 주장이었었는데 이제는 독립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기에 먼저 독립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한다고 주장을 세우며 남성과 여성을 차별 하였다. 부인은 이러한 것들을 없애기 위해 방법을 제시하였다. 첫째, 남성들이 여성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을 고쳐야한다. 둘째, 한국 여성을 해방시키는 것보다 해방 준비를 하기 위해 여성 교육을 해야한다. 여성들에게 여성교육을 중요시한 이유는 가정내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책임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김응순 <기독신보>에 이러한 내용을 실었다. 

가정교육은 교육에 긔초이며 가정교육을 올케식히랴면 오맘되는 이의 책임이 더욱 큽니다. 그럼으로 딸서 녀자 교육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열심으로 공부를 식혀 한가지로 문화의 역에 나아가게 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나이다. 

여성의 지위향상 또한 가정과 관련이 되어 있었다. 여성은 아이를 낳고 잘 양육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에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 또한 가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 민족의 발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 여성은 교육, 봉사, 등으로 활동해 나갔다. 가정교육이 중요했던만큼 가정에서 거의 모든 일을 맡고 있던 여성이 배워야한다는 주장이 강해지게 되었다. 여성이 하고 있는 일들에 남성은 더 이상의 차별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여성 문제 인식 변화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여성단체인 YWCA 연합회였다.  

    

여성의 리더십 

여성들은 찬양회라는 여성단체를 조직하였다. 찬양회는 두가지를 추진하였는데 첫번째는 여학교 설립운동, 두번째는 여성계몽 사업이었다. 이 두가지의 일로 찬양회는 일요일에 정기로 집회를 열었으며 연설회와 토론회를 진행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100명 가까이 참여하였다. 심지어 외국인들도 이 찬양회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찬양회의 설립은 사회활동과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으며 그 결과로 여성의 리더십 형성이 가능했다. 여성 교육이 확대되며 여성 단체들이 많이 생겨났다. 여성단체들은 주로 후원을 하였으며 자선사업과 같은 계몽활동을 전파하였다. 부산에서는 국채보상에 대한 논의로 시작하여 일본의 보호국에서부터 벗어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였다. 이 국채보상운동은 사람들이 많은 참여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놀라운 것은 여성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여성들은 여성들만의 조직을 만들어 전국에 30개에 이르는 국채보상부인회가 만들어졌다. 여성의 리더십이 발휘된 네가지 사실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는 여성들이 민족운동 조직을 따로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둘째, 남녀동등권을 찾으려는 여성에 대하여 강력한 주장을 펼쳤다는 사실이다. 셋째, 여성 리더들이 운동을 이끌어갔다는 점이다. 넷째, 예전에는 양반 여성 중심으로 사회가 진행되었다면 이제는 양반 여성들뿐만이 아닌 기생 출신인 여성들도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성들의 리더십은 교육과 문화사업을 중심으로 많은 역할들을 해냈다. 


여성, 노동력 (노동 실태와 사회적 위상)

교육을 받게 된 여성들이 증가하게 되면서 여성들의 취업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고용주들은 물품 판매를 위해서는 친절이 필요하다 생각하여 여성이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서비스직은 여성들에게 적합한 직업이 되기 시작하였다. 서비스직에서 일하기 시작한 여성들은 두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서비스직 취업 인구는 도시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40대였다. 도시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만큼 도시지역이 많은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둘째, 실업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여성들의 서비스직은 경쟁률이 항상 높았다. 서비스직에 취업을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여학교를 다녔으며, 시험을 통해 뽑히게 된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오는 고충은 어쩔 수 없었다. 성적 약자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으며 그들의 채용기준은 외모였다. 여성의 취업은 여성교육의 실시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증가되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가정교육에 가장 중요한 인물인 여성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느낀 시기였기에 여성의 교육이 더욱 강화되었고, 그러한 요구들도 증가하였다. 이런 일들이 여성들에게는 사회에 참여하고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런 배경과 관련이 되어 여성이 직업을 가지는 것이 여성해방을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여성의 노동력 덕분에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이유가 여성의 직업진출이 늘어날 수 있던 것이다. 취업이 여성들에게 생계를 이끌어 나가는데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조선 여성들의 배움 

조선인 여성은 성별 차별을 겪었다. 조선인 여성의 학교교육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조선에서 지방에서 하는 여성교육은 말도 안된다고 이야기하였다. 특히 평민이 사는 곳보다 양반이 많이 사는 곳은 차별이 더 심하다고 이야기하였다. 대부분 육아 문제, 경제적 여유와 같은 이유로 학교를 못보냈다고 이야기하는데 대부분 남성중심 사상이 문제였다. 가정적으로 여유가 있다하더라도 여성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여자는 시집만 가면 된다는 주장과 교육을 받은 여성은 가사 능력이 부족하고 남편을 섬기고 시부모를 섬겨야한다는 주장이었다. 여자 유학생 가운데는 경제적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부정적 인식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여성 교육을 막는 여성차별의식에 대해서 언론이 계속하여 지적하고 있다. 

[보통학교 입학자는] 여자가 남자의 ⅙ 에 불과하다.. 어째서 여자 입학자가 이렇게 적을까. 우리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남자의 차별적 사상이 아직도 조선 부형의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조선인의 생활난 때문이다. 

조선 여성들은 남성 중심적 교육환경 때문에 교육기회에서 밀려났는데 그 책임도 여성이 져야 했다. 조선 사회의 무책임했던 여성교육이 여성의 무식을 낳았다며 여성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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