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조선에서의 반기독교운동의 전개과정과 한국 기독교의 분열


목차

  1. 조선에 퍼진 사회주의
  2. 사회주의와 천도교 청년세력의 기독교 비판
  3. 기독교계의 대응
  4. 반선교사운동과 동맹휴학



조선에 퍼진 사회주의

1917년 10월에 발생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련이라는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했으며,  많은 지식인과 민중이 전세계로 퍼진 사회주의에 매료되었다. 마침 일본의 천황 다이쇼의 재임 기간동안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맞게 되었는데, 정치・사회・문화 각 방면에서 일어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인 운동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사회주의가 급속히 번졌다. 독립운동가들이 조직한 한인사회당을 시작으로 1920년대 초까지 만주, 연해주, 일본에 많은 사회주의 단체가 결성되었고, 3・1 운동에 참가했던 민족 운동가 가운데 사회주의를 수용한 사람이 많았다. 국민들은 3・1운동 이후 실의에 빠져있었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 그리고 워싱턴 회의에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여 실망에 빠진 상태에서 민족운동가들은 볼셰비키 혁명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본 것이다. 조선에 사회주의가 도입되기에 매우 적절한 시기였다.

국내에서도 사회혁명당이 결성되는 등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국내외 한인 사회주의는 민족주의계와 공산주의계로 나뉘었는데, 일제강점에서 민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절박한 과제는 사회주의자들로 하여금 민족주의계열과 연대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민족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을 구성하는 문제는 국내에서 특히 쟁점이 되었다. 모든 유물론적 사회주의자들은 종교를 비과학적 세계관으로 여기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따랐기에 종교를 궁극적 타도 대상으로 여겼으며, 공통적으로 종교 배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천도교와 같은 민족종교가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고, 기독교에도 민족종교가 대거 포진한 상황에서 반종교운동을 전개할 수도 없었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운동은 1928년 국제공산당이 결정한 “12월 테제”를 기준으로 그 전과 후가 다르게 전개되었다. 

사회주의는 조선에 들어와 사회주의를 전파하려던 많은 소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 일본 유학생 등의 영향으로 여러 방향에서 조선에 유입되었다. 이 새로운 사상은 당시 개신교계의 대표적인 언론지였던 기독신보에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글이 실릴 정도로 광범위한 호응을 얻었다. 특히 진보적인 지식인과 청년들에게 많이 받아들여졌으며 이동휘의 한인사회당 창설을 시작으로, 여운형을 비롯한 많은 민족 지도자들이 공산당에 입각하여 활약하였다. 

교회의 청년들도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됨으로써 정신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으며, 신도들도 개신교만이 서양문명의 유일한 전달자가 아니며 사회발전의 실체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교회 내의 진보적 인사들은 사회주의의 시각으로 조선의 교회를 돌아보기도 하였다.자연스럽게 사회주의자들이 생겨나자 그들은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에 힘썼다. 그들은 개량주의 노선에 선 민족주의 운동을 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키고자 했고, 사회주의의 과학적 세계관을 선전하기 위해 다양한 미신과 종교사상을 극복할 필요를 느꼈다. 따라서 반종교운동은 계급투쟁의 구체적 실천 방안의 하나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사회주의와 천도교 청년세력의 기독교 비판

사회주의의 최대의 적이었던 기독교는 대체로 세 가지 큰 틀로 비판되었다. 첫째,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종교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적용하여 비판하였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종교론인데, 배성룡은 <시엣후레>라는 공산주의 이론가의 말을 인용하여 현대의 종교와 인간의 해방과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으며 인간해방을 실현하려면 모든 기성종교는 폐멸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등, 사회주의자들은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비판하였다.

둘째, 진정한 인간해방을 위하여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아편으로서의 기독교를 배척하였다.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종교는 민중의 억압을 악화시키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특히 선교사들의 친일과 인종주의적 태도, 그리고 교회 내 비리 등의 반개혁적 신앙이 사회주의자들의 눈에는 아편처럼 여겨진 것이다.

셋째, 기독교의 타고난 보수적 기질은 사회주의 원리와는 일치할 수 없음을 비판하였다. 기독교를 서슴없이 비판한 한의건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은 타당하기는 하지만, 지나친 사회주의적 폭력만을 위한 그들의 노선이 정당성을 훼손해 버리고 말았다. 실제로 그들은 반기독교운동 전개 중 무수한 폭력을 동원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 천교도 청년들 또한 기독교를 허위와 인습에 기초한 종교로, 천교도를 그런 기성 종교를 극복한 새로운 종교로 여기는 차원에서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게재하는 등 반기독교운동에 가세했다. 그들은 종교가 언젠가 파괴될 것이며 그 가치 또한 부인해야 한다는 반종교론을 주장하는 글을 「개벽」에 싣고, ‘과거의 종교’ 즉 기독교가 사람을 병들게 만들고 신화적 미신으로 사람의 본성을 흐리게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종교에 기반을 둔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세력의 반종교론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천도교 청년 세력들의 기성종교반대론은 1924년에 들어서면서 더욱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그들은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기성종교에 대한 비판을 넘어 구체적인 대상을 지목하기 시작했는데 비판의 대상은 기독교였다.

1924년 3월 이돈화는 인간이 악한 행동을 하는 원인이라고 주장한 사회제도를 완전히 개조한다면 사회의 악을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돈화는 크로포트킨의 주장을 이용하면서 현 사회의 모든 문제는 잘못된 사회제도에 그 원인이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사회를 이루고 있는 사회제도 근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은 자연스럽게 당시 사회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자본주의 제도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었다.

1924년 8월 천국행 이(二) 라는 글에서 이돈화는 자본주의 제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이돈화는 현대의 인간조직은 개인이 세포를 이 루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세포를 이루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현대의 국가는 개인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삶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자본의 삶을 보장하기 위해 나타난 사유재산제도로 인해 개인과 사회는 적대시 하게 되었고, 자본가 개인의 이익에 따라 노동자들의 생활이 결정된다고 비판했다.이돈화의 강력한 자본주의 비판은 총독부에 의해 기사가 압수⋅금지되었을 정도로 강한 것이었다. 이돈화의 글은 단순히 이돈화 개인의 주장을 넘어서 그가 이론적 주도성을 가지고 있었던 천도교 청년세력들도 공유했을 것이다. 

천도교 청년세력의 자본주의 비판은 자본주의에 취약한 농민을 기반으로 하는 천도교가 드러낼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볼 수도 있다.천도교 청년세력의 자본주의 비판은 1924년을 들어서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것은 사회주의 사상의 성장과 관계가 있었다. 1923년부터 빠르게 성장한 사회주의 사상은 1924년 들어서면서 청년 지식층의 필수교양이 될 만큼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1924년부터는 「개벽」의 지면에 사회주의적인 글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천도교 청년세력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 이돈화의 주장은 사회주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던 천도교 청년세력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천도교 청년세력의 변화된 사회인식은 종교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존 천도교 청년세력의 종교비판은 허위와 인습에 빠진 ‘기성종교’라는 일반론에 머물렀다. 그러나 1924년부터는 종교와 사회문제의 관계가 종교비판에 있어서 중요한 근거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가장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자본주의와의 관계는 중요한 판단 근거였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당시 기독교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당시 기독교는 교내 지도자들 대다수가 지주나 병원 의사, 학교 설립자 등의 중산층 이상의 계층으로 이루어졌을 만큼 자본계급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것은 대표적인 기독교인이었던 신흥우도 현재 기독교가 자본계급에 의해 이용당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할 정도였다. 따라서 천도교 청년세력의 기독교 교회세력에 대한 비판은 천도교 청년세력의 인식 변화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개벽 창간자 차상찬은 평양의 기생집에도, 간통소송자도, 고리대금업자들 중에도 장로나 목사가 많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차상찬은 신민부의 이춘섭을 돈과 권력에 눈이 먼 타락한 인물로 그리고 있었다. 곧 당시 평양의 기독교 교회세력이 돈과 권력에 눈이 어두워 사회적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난이었다. 이처럼 평양의 기독교 교회세력을 향해 매우 신랄한 비판이 가해졌다. 차상찬의 신랄한 비판은 곧 평양 기독교인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개벽」 규탄집회가 열리고  개벽 잡지에 대하여 사회와 교회에서 대응책을 실행할 것을 결의하는 등  당시 평양 기독교 교회세력들의 분노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천도교 청년세력들은 기독교 교회세력이 현실과 동떨어진 지배자들을 위한 종교라는 점을 강력히 부각하며 1925년에도 이어졌다. 그들이 개신교 지도자들이 자본계급과 연결되어 부유하며, 일부는 오직 돈 버는 일에만 눈이 멀었다고 비판하자 사회주의자들은 천도교를 협력 가능한 세력으로 보았고, 둘 사이에는 우호적 관계가 유지되었다. 조선공산당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천도교 청년세력과 같은 행동을 하는 효과를 만들었으며, 간접적인 형태로나마 천도교 측과 통일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새로운 조선공산당 지도부가 민족주의자 지도부가 민족주의자들과의 광범위한 연대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자,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은 1926년 중반을 지나며 잦아들었다.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기독교는 비판하되, 기독교 민족주의자들과는 개별적으로 연대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1927년 창립한 신간회와 근우회가 그 결실이었다. 이렇게 반기독교운동은 휴지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1928년 “12월 테제”를 통해 한국에서 지식인 중심의 사회주의 운동이 아니라 노동자・농민 중심의 계급투쟁을 전개하라고 지시하며 상황은 반전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의 태도 변화로 신간회와 근우회는 1931년 경 해산했고, 강력한 반종교운동이  전개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종교를 민족개량주의 단체로 규정하고, 종교가 민중에게 허무한 사상을 주입한다고 비판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는 제국주의의 옹호자라고 규정하고 조선프롤레타리아 동맹까지 합세하여 강력한 배척운동을 하였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차원에서 행해진 이 시기의 반종교・반기독교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개신교 농촌운동과 절제운동 또한 사회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었다. 그들은 일본의 식민 정책에 편승하는 것 뿐 아니라 부르주아의 이익을 반영하고 농민의 궁핍을 가중시키는 것이 개신교 농촌운동이라며 비판했다. 절주단연운동 또한 소부르주아적 발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개신교 사회운동이 당시에 기여한 바를 완전히 무시한 것으로, 선동적이었다.

조선공산당의 민족통일전선 정책은 종교에 대한 태도에도 적용되었다. 식민지 시기 민족주의 세력 중 상당수가 종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태도는 민족통일전선정책과 연결되어 있었다. 조선공산당의 종교에 대한 입장은 분명했다. 조선공산당은 천도교는 민족통일전선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들은 천도교가 혁명적 세력으로서 민족통일 전선을 함께 구성할 협력대상으로 보았다. 이러한 조선공산당의 판단은 이미 1924년 무렵부터 천도교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24년 3월 코민테른 원동부에서 결정된 조선 문제에 대한 결정을 보면 천도교는 협력을 추구해야할 대상으로서 설정하고 있었다. 즉 1924년 무렵부터 천도교를 협력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이 사회주의세력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앞서 살펴 본 것처럼 천도교 청년세력이 󰡔개벽󰡕을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한 것도 천도교를 협력대상으로 판단한 중요한 근거였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가장 큰 사회문제로 보았던 조선공산당에게 자본주의를 비판한 천도교는 충분히 혁명적 세력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조선공산당을 둘러싼 상황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반기독교운동을 소강시켰으나 이것은 수면 아래로 잠시 잠복한 것일 뿐이었다. 새로운 상황의 변화, 특히 민족통일전선정책의 변화에 따라서 언제든지 수면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기독교계의 반응

사회주의와 천도교의 반기독교운동이 한창일 때, 「개벽」은 특집을 만들어 반기독교운동에 대한 개신교계의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때 반기독교운동을 냉소적으로 평가절하 하며 대응할 가치도 없다는 태도를 보인 사람도 있었으나, 그것이 당시 개신교 교역자와 교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진 생각이었을 것이다.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적 공세에 대한 조선 기독교의 대응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타났다.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에 대해 철저히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던 그룹과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개선방향을 찾던 그룹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 그룹은 반기독교 운동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사회주의자들에게 기독교를 수용하고 이해하여 줄 것을 주장하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장성상은 사회주의자들에게 9가지 제안을 하였고, 최석주는 윤치호의 강연 내용을 인용하여 역사적 정세를 무시하고 그 원칙론만을 고수하려는 사회주의의 경직된 교조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들과 달리 YMCA와 같은 사회단체에서 사회운동에 참여하던 개혁적 기독교인들은 반기독교운동의 타당성을 수용하는 입장으로, 기독교의 폐해를 제거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았다. 1920년대 중순은 사회주의가 모든 청년 지식인의 필수교양이 될 정도로 유행하는 불가피한 시기였기에, 사회주의의 영향력은 젊은 개신교인들 사이에서 훨씬 더 컸다. 또한 이들은 사회주의를 사상적인 대적으로 생각하기 이전에 유사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으로는 YMCA 학생부 간사 이대위가 있다. 그는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원리는 다르지만 착취와 억압 같은 사회적 문제를 개조하려 한다는 점에서 동일함으로,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이상적 신세계를 만드는 데 서로 조화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목적에서 탈선하면 인류를 요란하게 하는 괴물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조선 기독교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개혁론자들의 비판의 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당시 조선공산당의 반기독교운동의 필요성이나 이유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한석원과 안경록과 다르게 신흥우는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한 것인데, 그는 「개벽」특집에서 기독교도 반성할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며 반기독교운동을 교회 변화의 자극제로 삼아 교회가 자본계급이 아니라 무산계급의 운명 개척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기독교운동을 기독교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가 아니라 기독교 교회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파악한 것이다. 다른 기독교 교회 인사들과 달리 반기독교운동이 기독교 교회세력의 변화를 위한 하나의 자극제가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것이다.

기독교의 개선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조선 기독교가 개인과 사회, 또한 세계를 위하여 조화롭게 움직여 주기를 기대한 개혁적 기독교인도 존재하였다. 이런 다양한 반응은 사회주의 이념과 반기독교운동이 당대의 개신교 지식인들에게 기독교의 본질과 존재 의미, 당대의 역할 등과 관련하여 근본적인 성찰을 할 수 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몇 개신교 지도자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동휘, 김규면, 그리고 사회주의자 감리교 목사 이경선이 있다. 이들은 신학교를 나와 목사나 전도사로 교회를 담임하거나 전도인으로 활동하던 독실한 신앙인이었는데, 미국에 가서 사회주의자가 되어 무장독립운동을 주장했다. 그들은 러시아 공산당과 국제공산당이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천명하자 국외에서 독입운동의 한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매개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사회주의자가 된 이후 기독교적 정체성을 유지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반기독교운동에 대한 반응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나타났다. 1926년 재미유학생들이 발행한 잡지인 우라키에는 반기독교운동에 대한 입장이 나타나있다.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글을 썼던 인물은 염광섭이었다. 그는 소위 과학가라는 이들의 반기독교운동이라는 것은 배우지 못한 이들의 운동이며, 특히 과학가들이 말하는 사유재산 폐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소위 사회주의자에 대해 허영심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평가절하하며,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염광섭이 보였던 반응은 신흥우나 조선 내의 기독교 교회세력의 반응과는 약간 결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은 기독교 세력 내부에서도 각자 처한 위치마다 반기독교운동을 바라보는 입장이 엇갈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반선교사 운동과 동맹휴학

사회주의가 교회 밖에서 심각한 도전을 하는 사이, 교회 내에서는 선교사와 제도권 교회에 도전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반선교사운동, 선교학교의 동맹휴학, 독립교회 수립 등이 있다. 3・1 운동으로 한국인의 민족의식이 전반적으로 크게 향상된 상황에서 선교사들의 연이은 과도한 우월감 표출로 선교사 배척운동이 촉발되었는데, 마침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 관심이 지식인 사회 전체에 퍼져 있었던 시점인지라 선교사들의 추문은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조선에서 선교사 배척운동이 일어난 원인으로는 조선 신도의 자각과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 등이 있었으나, 선교사의 조선인에 대한 태도 또한 한몫 했다. 선교사들은 조선 민족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한 채 친일화 성향을 견지했으며, 조선인에 대해 인종적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비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아펜젤러는 “조선인들은 절간의 생쥐처럼 빈한하고, 개처럼 게을러 빠지고, 돼지처럼 더러우며, 늑대처럼 앙숙을 품고, 위선자처럼 교만하다”고 혹평하며 조선인을 야만시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기에 야만적이라고 생각되는 조선의 풍습을 촬영하거나 상품으로 만들어 세계에 알렸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선교 활동을 돋보이게 했으며 인정 받고자 했다.

대표적 사건으로는 미국 선교사 헤이스머(C.A. Haysmer)가 벌인 사건이 있다. 허시모 사건은 서양 선교사들의 추문이 연이어 터져 나오던 시점에 벌어졌는데, 평양병원에 근무하던 그는 자기집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먹은 12세 된 김명섭을 붙잡았으나 금전 보상을 받지 못하자 양쪽 뺨에 초산은으로 “도적”이라 새겨넣었다. 아이는 뺨을 계속 문질렀고, 결국 상처가 덧나 흉터가 생겼다. 어린 소년은 초산은 중독으로 약 3주일간 병석에 누워있었고, 그 때문이었는지 아이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인과 교회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허시모 사건이 1년이 지나던 때에 평남 순안의 일본인 검사에게 발각되어 헤이스머를 기소한 것이 자극적이고 과장된 형태로 보도되면서 반선교사 여론이 크게 일었다. 허시모 사건은 당시 선교사들의 비행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선교사들의 만행은 그들이 운영하는 학교나 기관에서 허다하게 드러났다. 목포의 정명학교 선교사 맹현리(H. D. McCallie)는 동맹휴학을 벌인 학생들에게 “우리 돈으로 세운 이 학교는 우리 마음대로 할테니 공부하기 싫으면 다 가라. 짐승 같은 새끼들아 다 가라”며 분풀이를 했다. 또한 동대문 부인병원에서는 선교사 나저서의 모욕으로 조선인 간호사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동맹휴학을 한 간호원 양성소 학생들에게 12일간의 추가 근무를 강요했다.이뿐만이 아니다. 대구 신명학교의 교장부인인 선교사 방혜례(H. E. Harriot)는 지각한 학생들을 몇 시간씩이나 감금하였으며, 진주의 선교사 안린애는 여학생 3명을 17시간 이상 불법 감금하기도 했다. 

반선교사 여론과 운동이 일부 선교사의 비상식적 행동, 고양된 민족의식, 사회주의의 영향력과 총독부의 반선교사 여론 조성 등이 복잡하게 얽혀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이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 선교사의 인종차별적 언행과 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에 항의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선교사들은 학생 면회 시 백인과 조선인을 차별하였으며, 사관의 가족부양비 지급에도 심한 격차가 존재했다. 또한 사관들의 실수를 꾸짖는 것에 있어서도 서양인은 웬만한 과실을 눈감아 주었으나 조선인 사관은 조그만 과실에도 면직시키곤 했다. 조선인 사관들은 이러한 차별대우를 견디다 못해 만국사령관 부스(William B. Booth)가 내한하자 교회 내 참정권을 넓혀주고, 봉급과 인사에서 차별을 없애주며, 한국인을 무시하는 외국인 선교사관을 정리해 줄 것 등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군대식 조직인 구세군에서 이런 항명이 벌어진 것은 그동안 한국인 사관에 대한 많은 차별과 그에 쌓인 불만이 쌓였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구세군은 진정서를 제출한 한국인 사관들을 출교시키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지정학교제도란 총독부가 정한 일정한 기준의 교사확보, 시설, 교과과정을 충족시킨 사립학교를 고등학교에 준하는 학교로 지정하는 제도였다. 지정학교가 되지 못하면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각종학교로 남게 되어 학생들이 진학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검정고시를 치러야 하는 등 큰 불이익이 있었다. 감리교 선교학교들과 달리 장로학교 선교학교들은 성서교육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지정학교 신청을 거부하였으며,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지정학교 신청에 부정적이었다. 이에 따라 장로교 선교학교의 학생들은 성경교과를 폐지하고, 자격을 갖춘 교사를 확보하며, 시설을 개선하여 지정학교로 만들어달라는 요구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대응했다. 동맹휴학을 대처하는 선교사들은 일방적이고 강압적으로 학생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고, 동맹휴학에 참여한 학생과 연관 교사를 처벌하기도 했다. 성서교육과 채플을 통해 전도하고자 했던 선교사들과 사회 진출이나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좋은 교육을 받는 것이 큰 목적이었던 학생들 사이의 갈등은 신사참배를 둘러싸고 악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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