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문화통치  
  2. 부흥회 
  3. 정치화와 민족화 
  4.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5. 한인교회





문화통치

3.1운동 이후 일본은 “문화통치"를 실행하였다. 문화통치란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한글 신문을 허용하며, 한국인에게 교육과 정치참여의 기회를 늘려주는 통치라 하였지만 실제로는 강력한 감시 아래 제한적으로 허용된 것이었다. 하지만 문화통치를 통해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에 개신교는 이를 활용해 여러 잡지와 신문을 발행하였다. 또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을 갔다온 개신교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해외에서 받은 고등교육을 국내에 소개하는 글들을 발간해 개신교의 출판은 크게 활기를 띄띠었다. 또 당시 한국 개신교계를 대표하던 인사들이 기독교 문화운동을 이해 한국인 자본으로 설립한 출판사인 조선기독교창문사를 설립하였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 3.1운동 이후 개신교계에서 선교사들의 비중보다 한국인의 역할 비중이 더욱 커졌음을 알 수 있다. 

한국 개신교에 대한 선교사들의 역할이 너무 커지자 선교사들은 스스로가 문제점을 인식해 만든 조직인 조선예수교장감연합회나 서로 협동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등을도 설립했다되었다. 초반에는 연합공의회를 선교사들이 주도하였지만 선교사의 수보다 연합회에 가입한 한국인의 수가 많아지면서 점점 한국인이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다. 연합공의회의 주도권이 넘어간것을 통해 한국 개신교의 주도권도 점점 한국인에게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연합공의회를 통해 선교사들이 독점하고 있었던 여러 사업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주도권을 잡음으로써 선교사들이 이끌었던 때보다 무조건 더 나아졌다고 할 수는 없다. 해외로 유학을 갔다온 한국인들이 늘어나면서 미국과 일본의 다양한 신학이 우리나라로 들어왔고 이로인해 신학적 다양성이 증가하게 되었다. 감리교는 신학적으로 매우 통일되었고 장로교는 매우 다양한 선교사들이 모여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다양성은 더욱 증가하였다. 


부흥회

3.1운동 직후 장로교 목사 김익두는 전국적으로 부흥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부흥회는 당시 침울했던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큰 힘이 되었으며 이 부흥회를 통해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다. 당시 평양대부흥의 주역이었던 길선주는 3.1운동에 참여하면서 요한계시록을 탐독하여 말세신앙ㅡ인간의 능력으로는 이 세상에서 평화와 정의를 이룩할 수 없고 그리스도가 재림해야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ㅡ을 가지게 되었고 길선주도 전국에을 다니며 부흥회를 개최하여며 재림, 심판 등 복음을 전파하였다. 개신교에서는 이용도가 신비주의 신앙에 기초해 회개와 새로운 삶을 강조하는한 부흥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부흥회는며 장로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데 회개와 새로운 삶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이용도는 형식주의와 교권주의를 비판하였기 때문에 교회의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부흥회는 선교사들이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한국인이 주도한 것이고 이 시기의 부흥운동은 착잡한 현실 속에 살아가던 민족들에게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미래를 소망하게 하였다. 총독부에서 이것을 막지않은 이유는 이것이 ‘식민지배에 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3.1운동은 대부흥운동 이후 각기 제 갈 길을 가던 민족적 신앙과 민중적 신앙이 만나 일어날 수 있었다. 민족적 신앙인들은 지도력과 동기를 부여했고, 민중적 신앙인들은 조직력과 동원력으로 기여했다. 3.1운동의 실패 이후 두 세력은 다시 흩어졌다. 민중적 신앙인들이 대대적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초현실적 희망으로 식민지 민중을 위로하는 사이, 개신교 민족주의자들은 멀어져가는 독립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항일 민족운동에 나섰다. 부흥회에 참석한 사람의 수와 비교할 때 항일 민족운동 참여자의 수는 매우 적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지배자에 맞서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기에 그것은 당연했다. 물론 참여한 사람의 수가 적다고 역사적 의미마저 작은 것은 아니었다.


정치화와 민족화

일제강점기, 미국은 정교분리원칙을 내세웠다. 정교분리원칙이란 첫번째, 정부는 종교와 관련된 내용에는 관여할 수 없다. 두번째, 정부정책이 특정 종교를 우대하거나 억제하는 결과를 가져오게해선 안된다. 세번째, 정교와 특정종교가 특별한 유착의 관계를 이루면 안된다라는 3가지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원칙이다. 이 원칙에  대해 선교사들은 수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에도 불구하고 여러 교육기관이나 교회 프로그램을 통해 기독교의 정치화와 민족화는 없어지지 않았다. 그 예시로 안창호의 대성학교가 있는데  안창호는 민족주의의 고취와 항일투쟁의 투사 양성을 목적으로 대성학교를 설립하였다고한다. 그리고 이 시기의 교회에서는 정치적인 토론과 훈련이 이루어졌으며 정치적인 정보를 나누기도 하였다. 교회의 이러한 진보적인 민족주의 성향은 매우 강하였는데 조직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나 민족주의를 확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며 교회의 조직적인 잠재력은 일제에게 위협이 되기도 하였다. 어떻게 교회가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을까. 먼저 1910년경 교회의 수는 2,000개 이상이었으며 신자의 수는 20만명 이상이었다. 성직자는 수천명이었으며 교회 관련 학교도 1,000개 이상이었다. 또한 기독교 관련 신문과 잡지가 발간되기도 하였고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교회나 기독교 학교를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와 화합 장소로 활용하는 등 교회는 민족주의 활동을 하기 최적화된 장소였다. 하지만 3.1운동 이후 많은 민족주의에 앞장섰던 기독교인들 중 대다수가 물러났고 교회는 자연스럽게 민족운동의 자리에서 물러나게되었다. 

교회에서 정치화와 민족화가 계속되는 과정에서 운영 정책에 관해 계속하여 의 견충돌이 일어났고 선교사들은 민족화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하지만 경상도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독립운동가 이만집 목사는 민족교회자치 선언을 통해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줄이고 한국인 중심의 교회를 이루고자 하였다. 민족교회자치 선언은 교회의 민족화를 더욱 강조하는 것이기도하다. 3.1운동의 실패 후 이러한 교회의 민족화와 정치화는 사라졌다. 

3.1운동을 탄압했던 일제는 다른 종교들보다 기독교에게 더 극심한 핍박을 가했고 기독교인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일제는 정책을 변화시켰고 그로인해 기독교의 이름으로 개혁적 사회변혁을 이루고자 하였던 수많은 민족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중점으로 한 민족운동대신 새로운 민족 운동을 찾아나섰다. 또 지금까지 성서를 중심으로 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한 것과 바빌로니아에서 포로가 해방한 것과 같이 현재의 힘든 상황에서의 탈출과 해방을 소망하며 민족의식, 독립의식을 바라던 기독교가 민족공동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초점이 현재의 상황에서의 해방에서 죽음 그 이후에 천국으로 옮겨간 것이다. 기독교의 ‘순수종교화’, ‘비정치화' 에 집중하였고 기독교의 이름으로 시작되었던 개혁적 사회변혁 운동이 반개혁적 기독교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교회의 민족화와 정치화는 여전히 민족의식 속에서 남아있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일제강점기 

조선 기독교는 개혁적 사회변혁을 기대하였다. 3.1운동은 애초부터 어느 한 종교나 어느 한 집단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독립을 소망하며 모인 여러 독립 단체들이 동시에 일어나 하나로 합쳐진 운동이었으나 그 중심적인 활동가들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처럼 개혁적 사회변혁을 기대하였던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강점 때부터 그랬듯, ‘종교의 이름'으로, ‘기독교의 이름'으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힘을 보여주었다.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배척하였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의 타고난 보수적인 기질, 즉 ‘비정치화'와 ‘몰역사화'등은 사회주의의 원리와 일치할 수 없고 또 자본주의의 구조에서 종교는 오히려 민중들을 억압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조선 사회에 반기독교의 분위기가 퍼져가면서 기독교를 “조선 독립의 모태"라 칭하던 김산(장지락)과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보이던 신채호도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독교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가다간 해체, 파산되거나 이름뿐인 종교집단이 될 위기에 처하였고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적인 반기독교운동은 기독교인들의 위기의식을 더욱 촉진시켰다.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적인 반기독교운동에 대한 조선 기독교의 대응은 2가지의 형태로 나타났는데 첫번째로 대부분 교회 안의 교역자나 교회신앙운동을 펼치던 평신도들, 신학자들로 구성된 그룹이었다. 이 그룹은 반기독교 운동이 일어난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며 모두 사회주의자들의 무지에서 시작된 것이라 생각하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를 이해하여야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기독교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지만 반기독교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은 없었다. 이들과 달리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일부는 받아드리며 개선하려 노력했던  개혁적인 그룹이 있는데 이들은 YMCA와 YWCA 등과 같은 사회단체에서 사회운동이나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반기독교운동은 기독교의 폐해를 제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이를 통해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올바로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 그룹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대위가 있다. 이대위는 사회주의의 주요목적을 기독교와 비교하며 사회주의가 그 본질적인 목적을 벗어나면 안되지만 사회주의를 이해하게되면 그 속에서 예수를 발견할 수 있고 앞으로 기독교가 나아갈 방향을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이대위의 의견에 대해 유경상도 사회주의의 삶과 예수의 삶을 동일시하며 힘을 실어 주었고, 김응순은 성경에 나온 사회주의적 성향을 말함으로써 여러 근거들을 제시하였다. 

1925년 한국 기독교계에는 ‘기독교사회주의’와 ‘사회복음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이 등장하였는데 반기독교적인 모습을 보였던 사회주의자들 속에서 기독교는 새로운 방향과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변혁적인 사상들이 등장하게 된 계기로는 1928년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국제선교대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있다. 이 대회에서는 20세기에 들어와 기독교가 세계선교로 장을 확장시키면서 나타난 여러 문제점ー선교국과 피선교국간의 관계, 주일학교 교육, 산업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 인종문제, 세계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촌인구와 그에 따른 문제점 등ー을 얘기하였고 기독교의 실제화와 사회화를 주제로 하며 강조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의 구원은 결국 이 사회전체를 위한 구원인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기독교에서는 개인의 구원을 강조하고있는 모습으로 보아 기독교의 실제화와 사회화가 제대로 이루어지고있지 않다고보았다. 이 대회로 인해 한국에도 ‘사회복음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처럼 1920년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조금씩 수용하며 사회변혁윤리를 전개하였다. 

1910년대 일제는 무단통치를 하였고 한국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비판하면서 1920년대에 들어서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높은 가치라고 보는 인도주의의 입장에서의 정치를 해야한다는 민족주의 신국가건설을 주장하였다. 안창호는 1916년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를 창립하면서 “우리는 다만 정의 인도만 표준하고 한층 두층 올라갈진대 비록 1만 마귀가 앞에서 저해한들 어찌 우리의 한 걸음을 방해하리오"라 하며 이미 정의와 인도주의에 입각한 독립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무단통치, 즉 무력이 아닌 정의와 인도를 기반으로 우리 민족이 자립해야할 때가 왔다고 선언하였으며 이는 곧 기독교 민족주의 운동에 근본이 되었다. 신간회 운동에 참여하였던 YMCA총무 신흥우는 1921년 말 워싱턴 군축회의의 결과 각 민족의 정치적 운명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으며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민족자결주의의 주장이 물러난 것 같았지만 세계평화와 정의 인도는 결코 없어질 수 없다고 확실하게 말하였고 제 1차 세계대전의 승리도 정의와 인도에 입학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보았다. 신흥우와 더불어 기독교사회주의자로 신간회에 참여한 이대위도 비슷한 주장을 하였는데 정부가 가지고있는 독재적인 성향과 지도자의 권위를 절대화하려는 국가권력을 비판하였다, 그는 인간의 권리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중요시하는 민주주의를 얘기하며 민족주의와 더불어 이러한 민주주의로 국가의 전체주의적 성향에 맞서야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 기독교 민족주의 세력은 세계평화, 정의, 인도, 민주주의 기반을 목표로 하여 사회를 변화시키고 개선해나가야한다는 것을 기본적인 원리로 생각하였으며 정의와 인도에 입각한 민주주의 신국가건설을 여러 운동을 통하여 굳건하게 지켜나갔다. 또 기독교 민주주의 세력은 조선 총독부가 허용하는 범주 내에서 ‘점진적 실력 양성론’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기독교 민주주의 세력은 점진적 실력 양성론의 이론을 기반으로 한 민족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물산장려운동이다. 물산장려운동은 서울과 평양 YMCA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운동은 일제에게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일으킨 대표적인 자본주의 경제운동으로 우리에게는 ‘우리가 만든 것 우리가 쓰자'라는 경성 방직 회사의 광목 광고로 잘 알려져있다. 1922년 6월 20일, 평양 YMCA 총무인 조만식은 “조선물산장려와 상공업의 진흥을 통해 삼천리가 삼천만 민족의 진개 낙원, 진개 에덴이 되기를 지성으로 갈망하는 바로다.”라는 기독교적인 설립목적을 가지고 평양물산장려회를 조직하였다. 평양물산장려회는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물산장려, 상공업진흥, 생활개선이라는 자본주의 경제운동을 하였고 교회의 청년회와 부인회, 상공업자, 일반사회단체 회원들을 대상으로 여러 강연 등을 통해 민족경제자립운동을 실천하였다. 기독교민족주의 세력은 토착자본가의 자본축척을 계기로 여러 기업설립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1921년 12월, 평양 YMCA의 김동원, 조만식 등은 평양실업저금조합을 설립하였으며  특히 1923년부터 1925년까지 평양의 기독교 세력들은 양말공업과 고무공업을 통해 일본보다 더 나은 경제상황을 확보하였다. 물산장려운동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조만식은 1926년 10월 평양절약저금식산조합을 설립하여 조선의 토산품 애용을 장려하고, 술과 담배, 그리고 사치로 낭비되는 돈을 저축하여 산업에 투자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평양 기독교계의 여러 기업설립운동은 실력양성을 근거로 한 자본주의 경제운동이었으며 경제적인 부흥운동을 더욱 촉진시켰다. 

1920년대 전반 기독교계에는 ‘사회개조론'이 새롭게 나타났는데 사회주의자들의 계속되는 기독교 비판에 의해 기독교는 이전의 개인의 구원만을 강조했던 모습을 반성하고 사회적으로나 민족적으로써 책임을 지기위해 사회개조론을 주장한 것이다. 이들은 사회개조를 위한 일반원칙으로 호조주의, 평등주의, 노동주의를 제시하면서 개인의 인격을 기르고 개선하기 위해서는 그 밑바탕인 사회적인 환경을 개선시켜야 한다고 말하였다. 서울 중앙YMCA의 초대회장이자 기독교 평신도 지도자인 이상재는 불합리한 사회를 지켜만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죄악이라보고 기독교인들도 사회적 개선에 관심을 가지고 힘써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오산학교의 설립자로 대표적인 기독교 민족주의자 이승훈은 기독교인들의 개인적인 구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구원을 강조하였으며 교회를 단순한 종교집단으로 보는 것이 아닌 한국의 교육과 산업을 일으킬 현장으로 보았다. 이처럼 1920년대 초반 많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사회개조론을 받아드렸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 신자들의 개인의 영정 구원보다 사회 구원을 더 절실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기독교인들도 사회 구원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힘써야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한인교회

3.1운동 이후에는 국외의 한인교회도 매우 성장하였는데 한국인들 중 동아시아 일대 및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국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증가하였다. 국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증가하자 국내 선교사들은 국외에 교회를 세우고 적극적으로 선교하였다. 국외선교의 시작점인 남만주는 러시아로부터 유입된 반기독교적인 분위기과 일본의 압박 때문에 선교하기가 쉽지않았다. 하지만 남만주지역 장로교회는 꾸준히 많은 교세를 유지하였다. 동만주는 국권침탈 이후로 기독교 운동가가 가장 많이 이주한 지역으로 교회가 아주 큰 역할을 하였다. 동만주의 교회는 3.1운동 이후 일본의 간섭과 제압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군자금 모금이나 독립군 양성, 민족계몽운동 등이 끊이지 않았다. 북감리교는 1921년부터 북만주지역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1930년대 후반까지 만주에 여성선교사를 계속 파견했다고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미국처럼 한국에서도 여선교회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동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북장로교가 북만주지역까지 활동을 확장하면서 북감리교와 선교지가 겹치게 되었다. 이로인해 북장로교과 북감리교는 서로 협상을 통해 선교지 분할정책을 시행하였다. 이 협약은 만주가 한국인의 선교지이며, 선교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주도권을 잘 나타내주고있다.

3.1운동 이후 연해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1912년 중단되었던 연해주의 선교를 다시 재개하였다. 그 예시가 김익두의 부흥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고, 심지어 사형까지 선고되는 일이 많아지자 연해주 선교는 사실상 1920년대 말쯤에 거의 중단되었다. 연해주 선교를 가장 지속적으로 했던 지역은 남감리교인데, 남감리교는 선교 시작 1~2년만에 교인 수가 6,800명을 넘었음으로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연해주는 공산주의혁명이 성공한 지역이었음으로 이 지역에서의 선교는 매우 힘들었기 때문에 연해주에서 활동하면 남감리회 조선연회 선교사들은 대부분 활동지역을 만주로 옮겨갔다. 결국 1932년 연해주 선교는 막을 내리게된다. 

일본에서는 1921년 도쿄에서 설립된 장・감연합의 연합예수교회가 유학생 중심으로 계속 운영되었는데 1920년대부터는 교회에 목사를 파견하였다. 간사이 지방에는 많은 한국인 노동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일본어도 미숙하고 전문지식도 없어 매우 무시받았다. 이러한 힘든 상황속에서 그 지역의 유학생들은 노동자들을 위한 사업을 벌이며 한국교회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였고 간사이 지역의 한인들을 상대로 선교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국권침탈 이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상하이로 모였는데 그 중에 개신교인들이 많이 있었다. 이로인해 상하이 선교가 더욱 활발해지며 한인교회가 생겨났는데 이때 생겨난 한인교회는 3.1운동 이후 기독교 발전에 기점이 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이 중심이 된 이 교회는 조선장로회 총회와 교류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지만 총회는 적극적으로 응하지않았다. 교인들은 1920년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며 활동을 이어나갔지만 1930년대에 들어서 점점 침체하며 해산되었다. 장로교의 산둥선교는 국외 한인선교와 달리 중국인을 상대로 한 외국인 선교로, 선교사들이 증가한 1920년대부터 활기를 띄었다. 조선장로회는 선교를 시작할 때부터 따로 교회를 설립하지않고 중국교회를 도와주는 형태로 선교하였다. 

한편, 해외로 진출하는 한국인들이 많아지면서 해외 한인교회도 설립되었다. 하와이로 이민을 가는 사람들 가운데는 개신교인들이 많았는데 그 중 대부분이 감리교였다. 하와이에 거주하는 감리교인들은 미국 북감리교의 선교대상이었다. 1905년, 하와이의 각 섬에 한인교회가 설립되는 것을 시작으로 주일마다 1천 명 이상의 예배가 이루어졌으며 미국 감리교에서 분리된 한인기독교회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하와이 지역 교회는 민족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와이 한인 교회는 강한 민족적 성향을 띄었다. 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열악한 환경을 피해 미국 캘리포니아로 많은 한국인들이 이주하면서 그곳에서도 한인교회가 생겨났으며 미국 곳곳에서 생긴 한인 공동체를 통해서도 한인 교회들이 생겨났다. 

미주의 초기 한인교회 대부분은 미국교회가 선교 차원에서 설립했다. 그러나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한인교회를 인도하고, 교회가 한인들의 민족적 구심점이 되면서 개신교인들은 미주 내외의 민족운동에 적극 협력했다, 한인뿐 아니라 미국에 온 초기 이민자들은 민족 교회나 회당을 중심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상호부조 하고, 낯선 이국의 삶에 적응해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조국이 일제강점 아래 있던 한인들의 교회는 거기에 더하여 독립운동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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