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무자비한 억압, 무단통치기
  2. 개신교의 대처와 왕성한 활동
  3. 개신교의 국내외 선교
  4. 3.1운동과 개신교

 


1910년 8월,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백성’ 이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번도 자기 것이 아닌 나라가 주권을 빼앗겼다고 저항할 이유를 찾기는 힘들었다. 우리가 반일 민족의식을 갖게 된 것도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나서 일본의 부당한 억압과 폭력을 모두 경험한 이후이다. 그렇기에 개신교인들도 마찬가지로 일본의 침략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은 헌병제도를 통해 한국을 다스렸다. 헌병제도로 다스린 기간을 무단통치라고 하는데, 이 기간동안 일본은 한국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기 위해 경제, 행정, 입법 조치들을 강력하게 거행했다. 집단적 저항을 막기 위해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일본에 저항할 것처럼 여겨지는 사람과 단체는 일단 검거, 혹은 사건을 조작해서라도 없앴다. 그래서 1911년 10월 평북 선천에서 북장로교가 운영하는 신성학교 교사와 학생 수십 명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1911년 6월 개성에서 개최된 YMCA 학생 하령회 관계자 및 참가자들도 구속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그들 입에서 나와야 하는 자백은 데라우치 총독을 독살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피검자들은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해 거짓 자백을 했고, 이 사건은 ‘데라우치총독모살미수사건'으로 조작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총독부는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알게 되어, 사건의 주모자로 중국으로 망명한 안창호를 제외한 지도부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이때 123명이 기소되었는데, 그 중 102명이 개신교인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진상이 해외에 알려지며 일본의 반문명적 기독교탄압사건으로 서구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일본은 123명 중 105명에게 중형을 내렸던 1심과는 다르게 2심에서는 주모자 6명을 제외한 나머지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신민회는 와해되었고, 기독교 민족주의를 이끌 지도자와 조직이 사라졌기에 당분간 국내에서는 활동이 이루어지기 힘들어졌다. 

105인 사건 해결을 위해 브라운과 각 교단 선교본부 및 선교사들은 외교적으로 압력을 가하면서도 일본을 자극하지 않았다. 선교에 지장이 없기를 바랐다. 일본의 통치 속에 있는 한국에서 일본과 불화가 있으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미국이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의 법이 미개하여 따를 수 없다던 미국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일본법을 존중하겠다는 것은 미국 선교사들이 외국인을 처벌할 수 있는 일본의 지배 아래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에게 가장 골칫거리였던 것은 바로 선교학교였다. 일본과는 다르게 한국에서는 선교학교가 개항기 이후 근대적 교육을 선도해왔기 때문에 수도 많고, 영향력도 컸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은 1911년 8월과 10월에 조선교육령과 사립학교규칙을 만들어 총독이 사립학교 설립과 운영 전반에 관하여 강력한 통제력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이 때문에 선교학교의 숫자도 이후로 급감한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일본은 1915년 포교규칙을 만들어 개신교 전파를 방해했다. 또 개정된 사립학교규칙은 일본어로만 수업을 하게 했고, 종교 교육과 활동을 금지했다. 이 때문에 장로교 선교학교 관계자들은 인가를 받지 않고 기존의 방식대로 교육을 할 것이냐, 아니면 그것을 포기하더라도 인가를 받을 것이냐를 두고 큰 논쟁과 갈등이 벌어졌다. 이 외에도 총독부는 헌병경찰을 통해 예배, 사경회, 부흥회, 기도회 등을 감시하고 내용을 간섭하고, 기독교 출판물도 검열하여 ‘불온’하다 판단되는 것은 출간지 못하게 했다. 또한 선교사와 개신교 지도자들을 감시하여 항일 발언을 절대 하지 못하게 했다.


개신교의 대응

상황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청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소규모 민족운동이 비밀스럽게 벌어졌다. 항일 비밀결사인 기성볼단, 송죽회, 조선국민회를 결성하여 민족운동을 하고, 개성 한영서원 교사와 학생들이 창가집을 만든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송죽회는 여성들로 이루어진 단체였다. 이들은 교회를 통하여 여성 계몽운동을 하고, 돈을 모아 국내외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그리고 이 조직은 철처하게 점조직으로 운영함으로 일본에 발각되지 않아 3.1운동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기성볼단은 안창호, 양기탁, 이승훈을 중심으로 1914년에 결성되었다. 안창호의 영향 아래 있으므로 기독교 민족주의를 가진 단체였고, 신민회의 계통을 잇는 비밀결사였다. 그리고 최초로 민주 공화정체의 국민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한 항일단체였다. 이들은 독립군 장교 양성을 위해서도 힘을 썼던 단체이다. 그러나 1915년 105인 사건에 의해 일본에 발각되어 해산되었다. 1915년 평양에서 결정된 조선국민회는 개신교인 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대조선국민군단의 국내지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군사조직이었으므로 회원들의 중국 지역 무관학교 입학을 추진하고, 무기 구입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고, 또한 ‘국민보'를 국내에 배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8년 일본에 발각되어 체포되고, 지도자들은 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조직기반은 남아 있었기에 3.1운동 평양 지역 궐기를 주도했다. 

이처럼 105인 사건 이후 항일운동은 청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민족운동을 주도하고,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 쟁취로 변화함을 볼 수 있다. 또 이들은 독립군 장교 양성기관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그리고 1910년대 중반 기독교를 떠나 대종교로 대부분 개종했는데, 이는 그들이 신앙보다 민족을 우선시했으며, 개신교를 통한 민족운동에 한계를 맞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개신교는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지 않으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꾸준히 조직을 확대하여 장로교는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창립했다. 또한 감리교는 1930년 기독교조선감리회라는 명칭으로 북감리교와 남감리교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했고, 기독교조선감리회 총회가 결성되고서는 한국인이 교단 수장으로 선출되었다. 장로교와 감리교는 연합사업도 꾸준히 함으로 1915년에는 ‘기독신보'가 창간되었고, 1918년에는 조선예수교장감연합회가 창립되었다. 이 단체는 한국인이 주도하는 교파 간 연합이라는 긍정적인 의미가 있었다. 

다른 교단들도 교세를 확장해 나갔는데, 첫번째로 성공회의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는 1914년 강화에 성미가엘신학원을 설립하여 한국인 사제 후보자를 교육, 이듬해 김희준을 첫 한국인 사제로 서품했다. 또 1916년 5월에는 교구의회를 처음으로 개최했다. 두번째로 구세군은 1916년 여자실업관이라는 한국 최초의 여성복지시설을 설립하고, 1918년에는 급식소와 장작배급소를 시작했다. 또한 1919년에 고아들을 위해 육아원을 세웠다. 세번째 단체 동양선교회는 선교사 토마스가 1911년 봄 경성성서학원을 열면서 발전했다. 이것의 다른 신학교육 기관과 다른 점은 남녀공학 및 실습이었다. 직접 전도를 추구하는 이 단체는 훈련된 전도인을 길러 방학 때는 학생들을 파송해 교회에서 봉사하고 개인 전도를 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대한기독교회는 펜윅(Malcolm C. Fenwick)의 반감을 사는 행동 때문에 많은 목사와 교인들이 이를 이탈하여 다른 교단으로 가거나 독자적인 교회를 설립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가장 크게 성장한 단체는 바로 일본조합기독교회였다. 이 단체는 1904년 조선에 들어와 일본인을 위한 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돕기 위해 한국인을 대상으로 포교를 했고, 이에 일본은 거액의 돈을 후원했다. 그렇기에 이 단체의 성장에는 종교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가 강했다. 어쨌든 이로 인해 이 단체는 세 번째로 큰 개신교단이 되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하더라도 개신교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저항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성장을 이룰 수 있었기에 1919년 3.1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국외선교도 하기 시작했는데, 장로교는 독노회를 조직하며 이기풍을 제주도로 파송했다. 총회를 조직하면서는 1913년 중국인을 상대로 전도하기 위해 3명을 중국 산둥으로 파송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산둥으로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이 산둥선교는 이 시대의 거의 유일한 외국인 전도 사례이다.

한국인을 상대로 한 국외선교의 첫 시작은 간도였다. 간도지역은 중국과 조선 사이에 계속해서 영유권분쟁이 있었던 곳인데, 조선 후기부터 한국인들이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만주지역에 사는 한국인들이 많아지자 1901년부터 남만주에 전도인을 파송했고, 이후 1910년대에도 거의 매년 만주에 전도인을 파송했다. 1909년부터는 러시아 연해주 선교도 시작되었다. 또 1909년 장로교는 한석진을 파견하여 유학생을 중심으로 도쿄에서 예배모임을 만들었고, 이후도 계속해서 사람을 파견했다. 그러다 연합으로 교회를 운영하자는 것이 받아들여져 모국에서 이루지 못한 교파연합 교회가 일본에서 이루어졌다.

북감리교는 1910년 중국으로 손정도를 파송했지만, 손정도는 독립운동에 더 관심이 있었던 터라 만주에서 1912년 일본 경찰에 붙잡혔고, 이로써 선교가 중단되었다. 이후 북감리교는 1918년에 다시 선교사를 파견했다.

1908년, 캐나다장로교와 남감리교는 동만주(북간도)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했다. 지역이 겹치니 남감리교는 동만주에서 물러나고 캐나다장로교가 담당하던 강원도 지역에서 전도를 하며 국내선교에 집중했다. 1913년, 캐나다장로교는 용정에 선교지부와 은진중학교, 명신여학교, 제창병원을 건립했다. 이동휘는 동만주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1911년 파견된 이동휘는 삼국전도회를 결성하여 3년 동안 36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1914년, 그는 동만주에서 민족운동가를 결집하여 동만주를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만들었다. 한편 1907년 동양선교회는 장로교와 감리교 때문에 국내 선교지의 폭이 좁아지자 간도에 선교사를 파견했다. 이 단체는 1917년 한국인이 사는 만주지역에 선교사 3명을 파송한 뒤, 1918년 시베리아로도 파송했지만, 선박사고로 순직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왕성한 국외선교는 한국인 이주민들을 위한 선교이기도 함으로 시대의 아픔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이 선교는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을 교회가 찾아  간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교회가 민중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3.1운동과 개신교

일본의 무자비한 무단통치 때문에 국외에서 활발한 항일독립운동이 망명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1918년 상하이에서는 개신교인이 주축을 이룬 신한청년단이 결성되었다. 이 단체의 지도자 여운형은 3.1운동의 주역이 되었는데, 그는 1917년부터 상하이의 한인교회를 맡고 있었다.

여운형은 계속해서 독립을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  1918년 1월 미국의회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T. Woodrow Wilson)이 전후 세계질서 재편에 관한 14개 원칙을 발표하는 연설을 듣게 되었다. 그 중 식민지 문제는 피지배 민족의 의견을 존중하여 결정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내용이 여운형의 마음에 꽂혔다. 그래서 여운형은 1918년 9월 선천에서의 장로교 총회에서 이승훈, 이상재를 만나 국제정세를 알려주고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또 그는 11월 윌슨의 친구 크레인(Charles Crane)이 상하이를 방문하여 중국인들에게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주장하라는 말을 듣고 자극을 받았다.

평화회의는 1919년 1월에 개최되는 것이었는데, 대표 파견을 위한 정부를 당장 조직할 수 없으니 급히 정당부터 만든 것이 바로 신한청년단이다. 정당을 만든 뒤 그는 총무 자격으로 독립청원서를 써서 윌슨과 평화회의 의장에게 전해줄 것을 크레인과 상하이 주재 미국 언론인에게 부탁했다. 또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에 파견했지만 청원서는 전달되지 않았다. 그래도 김규식은 파리에 가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김규식이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한 때는 1919년 3월이었고, 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구성되었을 때여서 그는 외무총장 겸 평화회의의 대표 자격으로 간 것이었다.

1919년 초 여운형은 위의 소식을 알리고 독립운동을 협의하기 위해 선우혁을 국내로 보내 이승훈, 양전백과 만나게 했다. 그렇게 이들은 서북지역 개신교 세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또한 여운형은 장덕수 등을 일본으로 보내 궐기를 준비 중이던 유학생들에게 실행을 독려하게 했다. 한편 미주의 대한인국민회도 민찬호, 이승만, 정한경, 개신교인인 세 사람을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을 위해 파견했으나, 일본 영사관의 방해로 가지 못했다. 이 소식이 일본의 영자신문에 보도 된 것을 재일 유학생들이 보게 되었고, 그들이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재일 유학생들은 1918년 말 의견을 모아 파리평화회의 대표단에 힘을 실어주는 거사를 하기로 했고, 이듬해 초 구체적인 방법을 논의해 독립선언을 계획 했다. 주도자 대부분은 개신교인이었다. 도쿄조선YMCA 총무 백남훈이 배후로 있었고, 또 개신교 여성 유학생들도 주체적으로 이 과정에 참여했다. 드디어 1919년 2월 8일에 독립선언서를 도쿄의 조선 YMCA회관에서 한국 유학생 4백여명이 모여 발표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 등과 함께 일본정부, 각국 공관, 조선총독부, 그리고 언론기관에 발송하였는데, 이 사건을 2.8 독립선언이라 한다.

이에 국내에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도교 지도자, 개신교 지도자, 개신교계 청년들, 개신교계인 이승훈 등의 사람들과 불교계인 한용운 등도 참여하게 되면서 종교계 연합전선이 형성되었고, 청년, 학생들도 합류하게 되자 더욱 광범위한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당시 무단통치 아래서 종교와 학교를 제외한 집회와 결사가 금지였기 때문에 종교계와 학생들이 3.1운동을 주도했던 것이다.

독립선언서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개신교인과 교류가 많았고, 성서를 읽음으로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최남선이 기초했는데, 그는 선언서에 포함된 정의, 평등, 자유, 무저항주의 등이 모두 기독교에서 나온 것임을 훗날 밝혔다. 그렇게 기초한 선언서는 천도교, 개신교, 불교 대표들이 점검, 수정한 후 마련이 되었고, 그것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개신교인 16명, 천도교인 15명, 불교도 2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임은 당연했다.

그렇게 3.1운동이 전개되었고, 개신교인들이 이것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3.1운동은 각 지역에 미리 마련된 조직에 종교계와 학생들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면, 그 조직이 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시위를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만세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것은 무단통치로 인해 우리 민족 안에 항일 만족의식이 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신교 지도자들도 국권침탈에 저항하지 않았지만, 이 시위에 대거 참여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개신교인들의 3.1운동 참여는 총독부의 통계 자료를 통해 잘 드러난다. 3.1운동에 관련하여 체포, 기소된 사람은 모두 19,525명이었고, 그중 개신교인은 3,373명이었다. 또한 여성 피소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개신교인이었다는 점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이는 개신교의 여성 교육 그리고 지도자 양성을 통한 여성의 의식과 지위를 향상시켜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개신교 여성은 한국 여성 중 가장 근대적 의식을 가진 여성들이었다.

또한 개신교는 많은 교인을 가졌던 천도교와 대등하게 3.1운동 준비과정에 참여했는데, 실제 거사에서는 개신교가 더 주도적으로 운동을 이끌었고, 그렇기에 더 많은 고통을 당했다. 총독부는 정말 잔인하게 시위자들을 진압하여 체포, 구금, 고문했다. 또 일본군은 많은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했는데, 이때 많은 교인들이 학살당하고, 교회가 방화되었다. 특히 제암리에서 개신교인과 천도교인을 가둬놓고 총을 쏘고 교회에 불을 질러 학살하고, 마을 가옥을 30여 채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제암리 학살 사건이라 부른다. 이처럼 많은 교인들이 학살 당했기에 개신교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는 숫자로도 볼 수 있는데, 1918년 약 23만 2천명이던 개신교인이 1919년 약 21만명으로 줄어 들었다.

3.1운동 준비단계에서 개신교인들은 거사 사실을 선교사들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선교사들 중 다수가 정치적인 문제로 친일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또 선교사들은 일본의 무단통치로 인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통을 동정하나, 이에 따른 구체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코필드(Frank Schofield)는 예외였다. 그는 3.1운동 직전 이갑성으로부터 협조를 부탁받아 3.1운동의 시위 모습,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 모습, 제암리와 수촌리의 사건 후의 모습을 사진을 찍어 보고서와 함께 세계 언론에 폭로했다. 또 북간도 용정 제창병원의 마틴(Stanley H. Martin)은 병원 시설을 독립지사들의 활동 장소로 제공했다. 또한 3.1운동 때 부상당한 한국인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치료해주었는데, 이들은 모두 캐나다 선교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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