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한말의 한반도 - 청일전쟁,전쟁이후
  2. 대부흥 - 한국 개신교의 부흥
  3. 대부흥 이후 -  평양 대부흥
  4. 대부흥 이후-  평양대부흥 이후
  5. 대부흥 이후 - 감리교, 장로교



한말의 한반도 - 청일전쟁 이후 

 한말의 한반도는 개항과 함께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장로교, 감리교 등 다양한 교단과 같이 경쟁하고 혹은 협력하며 열심히 선교활동을 하였지만 처음 약 10년 동안의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큰 변화를 가져온것은 청일전쟁이다. 청일전쟁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군대 파견을 조선 정부가 요청하였다. 청이 군사를 보내자 일본 또한 군대를 파병하여 두 나라의 군대는 거의 동시에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일본군의 파병에 놀란 조선 정부는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하는 조약을 맺어 농민군을 해산시키고, 청일 양군이 동시에 철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의 철수 요청을 거부하고 ‘내정개혁'을 핑계 삼아 경복궁을 기습 점령 한 후 선전포고도 없이 청을 공격했던 배경이 청일전쟁이다. 순식간에 한반도는 청과 일본의 전쟁터로 변하고 조선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선제 공격으로 승기를 잡은 일본은 조선의 내정간섭을 심화하며 중국과 일본은 아산, 성황, 평양, 의주 등에서 대규모 육상전을 벌여 국토는 유린당하고 백성들은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특히 평양 전투는 청군에서 전사자 2천명에 부상자 4천명이 발생할 정도로 큰 전투였다. 평양 인근은 황폐화되었고 더군다나 전국적 콜레라가 유행하여 수천명이 사망하며 민중은 혼란에 빠졌다. 청일전쟁 기간동안 십자가를 내건 교회와 선교시설들이 유일하게 안전했고, 한국민중은 살기위해 교회로 몰렸다.    전쟁이 끝난 이후 3배가 넘는 교인들이 증가하였고 본격적으로 선교가 이루어지면서 한국 개신교는 중심지로 잡아 갔다. 이러한 상황은 러일전쟁때에도 나타났는데, 제물포 앞 바다에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다.  민중은 이때에 재산상 피해를 입었고 평양지역의 피해가 극심했다. 전국적으로 생필품값이 폭등하고 혼란에 빠져있을때 일본은 각 부서의 고문을 파견하여 내정을 장악하고 여러 전쟁을 겪으며 장로교와 세례교인 수가 두배씩 증가하게 되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라는 전쟁 와중에 백성들은 많은 정신적,  물질적 고통을 겪었고 이런 상황속에서 한국 민중은 개신교를 서구열강의 종교로 인식하며 피난처로 삼았다. 지식인 계층 또한 개종하는 일이 벌어지고 청일전쟁은 애국적 지식인들로 하여금 나라의 장래에 대하여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고 본격적인 독립자강운동을 벌이게 했다. 7월에 조직된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시민의식과 애국심을 높이고 정부에 개혁을 요구했지만 정부 내 보수파는 위기감을 느끼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해산하고 지도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그 중 선교학교 출신인 이승만의 투옥은 선교사들 사이에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승만의 배재학당 은사인 아펜젤러, 언더우드, 게일, 벙커 등이 그를 보살피고 보호하기위해 나섰다. 이승만은 영어성서를 읽고 회심의 경험을 하고 자신과 함께 수감된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또한 러일전쟁의 공포와 혼란 속에서 출구를 찾고있던 지식인, 관료들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고 왕족, 관료, 양반 출신들이 대거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고 한국교회는 망해가는 나라속에서 고통받는 민중을 위로했고 기독교를 통해 나라를 구하려는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의 집단 개종은 유학의 전통 속에 있던 양반, 지식인들로서는 첫 사례였다.  


한말의 한반도 -한국 개신교의 부흥

  청일전쟁의 이후로 한국 개신교는 부흥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901년 개성에서 남.북 감리교 신학 공부반이 개최되었고 많은 학생들이 성령임재를 체험했해다고 기록되어있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처 성령임재에 관한 기록이라고 예측된다. 또한 “옛 감리교 부흥운동" 이라고 미국의 서남부 개척지에서 행한 천막집회를 통해 이루어진 부흥운동은 횡량한 개척지에서 외롭게 살던 가난한 민중들을 일정한 장소에 모아 천막을 치고 부흥집회 겸 축제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러한 천막집회에서 교인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미국의 중산층 종교로 자리잡으며 개신교 최대의 교파가 되었다. 그리고 감리교는 이성적 신앙이 아닌 성령임재의 체험을 통한 감성적 신앙을 신앙을 강조하는 전통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부흥현상의 불을 지핀것은 1903년 여름 원산에서 열린 남감리교 및 캐나다 장로교 여선교사들의 모임이었다. 하지만 수년동안 최선을 다해 전도하였음에도 성과가 없던것은 성령의 임재가 없었기 때문이라 고백하고 회개하자 참석자 모두가 성령 충만을 경험했다. 그리고 프랜슨은 원산에서 일주일동안 부흥집회를 열었고 그 뒤 연이어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선교사들은 러일전쟁을 통해 공포와 혼란에 빠졌을 시기에 부흥회를 개최하였고 20세기 부터 시작된 부흥현상은 1907년 1월 평양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다.   한말의 한반도 - 평양 대부흥

 한국 개신교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평양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다시 황폐해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서둘러 피난을 가버리는 바람에 교회는 텅 비어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공포가 사라지며 평양에는 다시 교인이 폭증하는 현상이 재현되었고 1905년 11월 17일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 독립국의 지위를 상실했다. 그리고 1906년 2월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며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붕미했고 한국은 반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인도 북동부 카시 힐스에서 1904년~1905년에 걸쳐 8천 2백명이 세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선교사들은 큰 자극을 받아 전국적으로 부흥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한국에서도 인도와 같은 현상이 일어날수 있도록 기도했고 1907년 1월 평양 사경회가 열리고  기도의 응답대로 대부흥이 일어났다. 모든 교인들이 통회자복을 하며 교회당이 울음과 통성기도로 뒤덮었다. 우리가 평양대부흥 운동에 대해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을 바로 알고 정립해 나가기 위해서이다. 

  지난날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에 비추어서 오늘날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의 모습을 살펴볼때, 우리들의 모습은 너무 부요하고, 세속화 되어있고, 정치화되어있고, 정욕적, 현세적이다. 그에 비해 평양대부흥운동은 진정한 회개란 무엇인지 살펴볼수 있고 복음 전파와 봉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교회와 목회자들의 삶의 열매가 되는 복음 전파와 사랑의 봉사가 무엇인지 바로 보여주었고 한국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전국 곳곳은 물론, 제주도와 중국과 러시아까지 내려가 복음을 전하며 사랑을 베풀었다.


한말의 한반도 - 평양대부흥 이후

  평양 대부흥 이후 한국 개신교의는 역사에서 전환점이 된 것은이 도니 사건이었다. 대부흥을 거치며 열렬한 전도운동이 벌어졌고 교인 수가 급증했다. 대부흥을 통해 영적 각성을 체험한 교인들이 전도운동에 나섰고 나라는 점점 망해가고 있어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와 비슷한 수준의 교인 증가였다.   대부흥의 결과는 성령체험과 통회자복 등 교인들의 신앙 각성운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 달랐다.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독특한 한국적 관습이 대부흥을 통해 널리 퍼졌는데 대표적으로 새벽기도와 통성기도가 있다. 새벽에 치성을 드리는 오랜 관습이 기독교와 만나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통성기도는 여러사람이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으로 서구 선교사들이 처음 접하고 놀랐을 정도로 한국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집단 통곡같이 한과 슬픔을 공동체가 같이 소리내어 표현하던 관습이 부흥회의 집단적 통회자복에 전이된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부흥회는 서구의 종교행위로써 한국인의 심성과 관습이 만나 한국적인 신앙 모습을 만들었다.   대부흥이 일어나기 이전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기독교인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대부흥 운동을 거치며 한국 교인들은 이성이 아닌 가슴으로 알게되고 조선왕조 5백년 동안 감성적인 민중의 종교적 심성은 항상 억눌려 온 것이 풀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 억눌려 왔던 종교성이 부흥회의 감정적 분위기와 맞아 떨어지며 한국 개신교는 진정으로 민중적 종교가 되었다. 한국 개신교는 몇가지 특징을 가지게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부흥회를 통해 경험한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구원과 일치시키게 된점이다. 구원이라는 의미를 고민하지 않은채 죄 고백을 통한 영적 구원에 만족하게 되었고 이것은 일본을 미워하는 것도 죄라고 교인들에게 가르쳐 민족적 증오를 죄로 고백하고 영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했다. 부흥운동이 번지면서 이성적인 사경회는 점점 감성적인 부흥회에 자리를 내주었고 개신교인들이 사경회보다 부흥회에서 거룩함을 만나며 서서히 옛 모습을 잃어갔다. 



한말의 한반도 - 장로교, 감리교

  장로교의 최초 설립은 1884년 9월 20일 중국에서 활동하던 북장로교 소속 의료선교사 알렌이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하며 개신교 선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장로교의 노회가 만들어지려면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지역교회의 당회가 일정한 수 이상 있어야 한다. 새문안교회가 최초의 조직교회라고 불리는 것은 1887년 최초로 당회가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장로교인 수가 수만 명에 이른 1906년까지 단지 33명의 장로만 배출했다. 이렇게 선교사들의 지도를 늦춘 이유는 한국 교인의 신앙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의를 조직하고 선교사 공의회, 합동 공의회를 걸쳐 드디어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최초의 노회가 탄생되었다. 총회가 설립되던 1912년부터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한국장로교회는 자유주의 두전, 신사참배문제 등 일련의 위협적인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평양 신학교를 중심으로 상당히 안정된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한국 개신교를 주도하는 교단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성장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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