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구한말 초기 교회형성과 선교활동

  1. 초기 교회 형성
  2. 초기 선교활동 (번역)
  3. 초기 선교활동 (병원과 학교)


선교과정에서 발생한 갈등

  1. 교파사이의 갈등
  2. 선교사들 사이에서의 갈등


교회의 형성 과정

  1. 교회 박해
  2. 교회 형성과정





 구한말 초기 교회 형성과정과 선교활동

  1. 구한말 초기 교회형성과정
  2. 초기 교회 형성 


장로교의 시작한국 개신교의 특징 중 하나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부터 기독교가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선교사들 말고도 기독교를 전파했던 존재가 있었음을 의미하는데 그들의 형성과정은 다음과 같다. 선교사들이 선교를 시작하기 전에 만주와 일본에서는 우리말 성서가 출간되었다. 그 책으로 개종한 한국인들이 중국 상인들에게 전해받은 성서를 한국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그들도 개종하도록 도운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성서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사람들이 개종하도록 돕는 일을 한 사람들을 ‘권서’라고 부른다. 이들이 바로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 기독교를 전파하는 역할을 했던 존재였다.이들 덕분에 선교사들은이 한국에 와서 주로 한 일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는 주로 개종한 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을 하였다.것이었다. 권서들이 씨를 뿌리고 그 열매를 선교사들이 거두는 것이었다.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권서로 인해 개종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그 수가 점차 늘어나자 한국인 권서 ‘서상륜’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에게 세례청원자가 많다고 하는 전보를 보냈다. 전보를 받았을 당시 언더우드는 내륙여행이 내정되어 있던 상태였는데, 언더우드가 내륙여행을 가지 않자 그 사실을  알게 된 3명의 사람들이 언더우드를 찾아가 세례를 받게 된다. 그렇게 찾아가서 세례를 받는 사람의 수가 증가해 언더우드는 누가?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조직해 교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1887년 9월, 언더우드는 세례교인들 중 몇을 장로로 세워서  자신의 집에서 장로교 조직의 교회를 자신의 집에서 시작하게 된다. 이 교회의 시작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낳았는데, 이전까지 선교사 중심의 영어로 된 예배가 진행되었지만 교회의 형성을 시작으로 한국인들 중심의 예배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교회가 바로 한국 최초의 장로교 교회인 정동교회(새문안 교회)이다. 따라서 정동교회는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개종한 한국인들에게 선교사들이 세례를 베풀어 세운 교회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권서들은는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첫번째로 선교사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다니며 성서를 전해주며 전도를 하는 역할을 했다. 선교사들은 그때 당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한국을 자유롭게 여행하기 어려워했기 때문에 권서의 역할은 독보적이었다. 두번째로 그들은 새로 개종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모임을 만들어 선교사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했다. 선교사들은 이들을 묶어 교회로 조직했기 때문에 더 빠른 전도가 가능했었다. 우리나라가 짧은 시간에 선교의 엄청난 확장을 이루게 된 것이 이들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리교의 시작우리나라의 감리교는 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제일 처음 아펜젤러 (Henry Gerhard Appenzeller) 가 세운 배재학당에서 감리교가 전파되었다. 이곳에 재학중인 아이들은 출세를 위해 학교에 들어온 것이었지만 기독교에 관심이 생기면서 아펜젤러에게 기독교를 배우게 되었다. 이후 세례를 받고자 하는 학생에게 아펜젤러는 세례를 베풀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 세례를 베풀고 나서 그는 처음으로 한국인을 위한 예배를 드리는 곳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이 곳은 벧엘예배당이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최초의 감리교 교회인 정동(제일)교회의 시초이다. 메리 스크랜턴 (Mary Fletcher Benton Scranton)이 세운 학교인 이화학당에서도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화학당의 창시자인 메리 스크랜턴 (Mary Fletcher Benton Scranton)은 학교 내 개종자가 증가하는 것을 알고 학교안에 여성들을 위한 신앙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세례청원자가 계속해서 늘어나자 아펜젤러는 그들을 교회로 조직했다. 위의 것들은이 1886년의 조불조약( 조선과 프랑스의 조약으로, 프랑스와도 우호 통상조약을 맺는 것을 약속하는 내용) 을 통해으로 가능하게 되었는데다. 개항장에만 머무를 수 있었던 선교사들은 조불조약으로 인하여 1890년대에 개항장과 주요 도시에 선교지부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었다. 선교의 구심점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또한 남장로교, 남감리교, 캐나다장로교, 호주장로교들이 들어와서 선교를 함께 선교를 했기 때문에 각 교단마다 주로 선교를 담당한 지역이 있었다.


부산호주장로교 (1809년: 부산 지역 전담)북장로교 (1891년 : 베어드 부부 (William M. Baird) 파견) 
대구북장로교 (제중원,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건설)
평양북감리교 (1893년 : 홀 부부와 노블 (W.Arthur Noble) 부부 파견  → 광성학교, 정의여학교의 기초 설립)              
1897년 :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 기홀 병원설립
1905년 : 평양 내륙중 영변에 선교지부 설치)북장로교 (1893년 : 모펫, 리(Graham Lee) → 널다리 교회, 숭실학교, 숭실여학교 설립 )

  • 평양은 보수파의 중심지였는데, 이 지부를 개척한 북장로교의 사람들이 모두 맥코믹신학교 출신이었으며 이 학교는 보수적 전통주의를 강화한 것으로 가장 보수적인 산학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선교를 시작한 평양은 보수파의 중심이 된 것이다.
함경도 원산북감리교 (1893년 : 홀 부부와 노블 (W.Arthur Noble) 부부 파견 → 광성학교, 정의여학교의 기초 설립)              
1897년 :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 기홀 병원설립
1905년 : 평양 내륙중 영변에 선교지부 설치)북장로교 (1893년 : 모펫, 리(Graham Lee) → 널다리 교회, 숭실학교, 숭실여학교 설립 )
강원도남감리교 (1898년- 1908년: 춘천에 선교부지 건설)
충청도북감리교 (1903년: 샤프(Robert A.sharp) 부부, 스웨어러(Wilbur C. swearer)                            등을 공주에 파견 및 선교지부 건설 )
전라도
남장로교 (1895년 : 테이트 남매가 전주에 도착하면서 시작(조사 정해원의 도움)               1896년, 1898년: 군산, 목포에 선교지부 건설과 병원, 학교,교회 건설               1900년대: 광주, 순천에 선교지부 건설, 병원, 학교 건설)


위 일들을 하는데 권서들이나나 전도자들은 선교의 기초를 닦았고 선교사와 더불어 교인들을 돌보고 교회를 건설했다. 학교에서 기독교를 배웠던 사람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와 교사로 활동을 하는 등 계속해서 선교를 이어갔다. 이를 류대영은의 <한 권으로 읽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책에서는 “역사에 기록된 이름만 역사를 만든 것은 아니다.” 라고 표현했다. 


  1.  초기 선교활동 - 병원과 학교

미국 선교사 매클레이는 고종에서 선교사업윤허를 받았다. 하지만 이는 ‘학교’와 ‘병원’사업에 국한되어 있었다.미국 선교사 매클레이가 고종에게 허락받은 선교사업윤허는 ‘학교와 병원’사업에 국한되었었다. 당시 조선의 분위기와 정부의 태도로 인해 적극적인 선교활동은 어려웠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학교와 병원을 설립해 간접적으로 선교를 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들이 먼저 시작한 것은 의료선교였다. 미국 공사관의 의사자격으로 온 알렌은 갑신정변으로 인해 부상을 당한 민영익을 치료함으로 고종과 그 추종자들에게 많은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혜택을 입어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을 설립치할 수 있었으며 이후 광혜원은 제중원이란 이름으로 바뀌게 된되었다. 그리고 새건물을 짓게 되면서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하게 된다.

감리교의 스크랜튼은 민간의료 병원으로 진료소를 시작하여 정식 병원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시병원이다. 이후 여러 병원이 세워졌는데, 선교사들의 병원을 방문하는 이들은 소외당한 민중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진료해줌으로써 평민계층에 복음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그리고 무엇보다 선교에 대해 적대적인 마음으로 폐쇄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던 민중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장로교의 언더우드는 고아원으로 교육선교를 시작했다. 그런데 사실 그는 고아인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기술학교를 꿈꾸었다. 그리고 이후 학생들을 받고 교육을 시작하면서 학생들에게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즉, 교육은 그 무엇보다 좋은 ‘복음화’의 도구였다. 초기 교육에서는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여러과목 속에 들어있는 복음적인 메시지를 듣고 그들이 개종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보았을 때 사실 학교는 병원보다 한국의 복음화에 큰 역할을 했다.


  1. 초기 선교 활동  - 성경번역

우리나라는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성서가 번역되어 상당수가 이미 한국에 배포되었었다. 그 결과 기독교가 많이 전파될 수 있었고 선교사들이 입국함으로 더 적극적인 복음 전파가 이루어졌다.다.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개신교의 시작은는 성서번역과 발행이라고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입국함으로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가 확산되었다.하지만 선교사들은이이 했던  성서번역하기 위해은 번역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어를 잘해야 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한국어 선생님이나 <한불 사전> 이라는 한국어 사전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들의 도움을 받으며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였다.았다. 초기 선교사들은 일본에서 번역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만든 최초의 한글 성서는 선교사들에게는 많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지만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는데, 먼저 첫번째로 선교 현장에서 사용하기에는 어법이 부정확한 부분이 있어서 힘들었다. 두번째로는 방언과 속언이 많아 다른 지역에서 사용하기가 어려웠다는 한계가 있다. 때문에 이들은 1887년 상임성서위원회 라는 조직을 형성해 본격적인 성서번역 작업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인력과 실력 부족으로 몇사람이 개인적으로 번역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했었다. 이 조직 안에서는 언더우드가 이수정의 마가복음을 개정하였고, 아펜젤러 등은 누가복음과 로마서, 그리고 요한복음을 개정했다. 

그리고 1893년 상임성서위원회를 개편하여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사람들이 조직을 운영했어도 개인적으로 번역했던게 대부분이었지만 이제 제대로 된 조직을 만들어 공적으로 성서번역을 하게 되었다. 선교사와 함께 번역에 동참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서울, 중부지방 출신이었기에 이는 한글성서가 서울말을 사용할 것임을 예고했다. 

성서와 마찬가지로 기본이 되는 찬송가는 예배가 시작되면서 함께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찬송가는 북감리교의 존스(G. Heber Jones)와 로트와일러(Louisa Rothweiler)가 만든 <찬미가> 였다. 이 찬양의 14장 “애국찬양(Patriotic Hymn)”의 가사는 오늘날 “애국가” 와 사실상 동일했다. 우리나라의 애국가의 가사가 찬송가에서 등장한 것이었다.장로교에서는 언더우드가 편찬한 <찬양가>를 호주 장로교는 <찬성시>를 공인 찬송가로 지정했다. 이때 정말 많은 찬송가가 만들어졌는데 이때 만들어진 찬송가는 영국과 미국의 찬송가를 그대로 가져와 번역한 것들로써 찬송가는 서양도입이라는 면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초기 기독교에 큰 전환점이 된 것은 1889년 삼문출판사가 만들어 지고 조선성교서회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두 기관은 개신교뿐만 아니라 다른 주제도 신문으로 출간해 1890년대 개신교 출판물들이 급증했다. 이는 신앙과 문화가 풍성해졌다는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각종 개신교 정기간행물들이 모두 삼문출판사를 통해서 출판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조선그리스도인회보> 나 <그리스도신문>도 삼문출판사를 거쳤다. 그리고 1900년대 부터는 한글 개신교 잡지인 감리교의 신학월보도 인쇄되었다. 위의 활동들은 단순히 신앙생활을 위한 것이 아닌 한국 사람들에게 서구의 문명을 소개하는 동시에 서구 사람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신문>은 1898년에 유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서로 돕는 관계라고 표시하면서 유교를 “인류의 지극한 법”, “만세의 큰 강령” 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또한 다른 선교사들은 불교를 “위대한 종교” 라고 존경심을 표시하기도 했다. 물론 모든 선교사들이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그들은 한국문화와 종교를 미개한 것으로 여기며 여기에 서구문화와 기독교의 조속한 전파를 정당화하는 글이 많이 재개되기도 했다. 삼문출판사는 인쇄사로 독립신문 같은 일반신문도 인쇄 했으며 존선성교서회는 출판사로 개신교 전파를 목적으로 삼았다. 

그리고 예배당 건축도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교인의 집을 예배공간으로 이용했을 것며 그렇게 교인이 모이면 그들은 예배당 건축을 시작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소래교회이다. 소래교회는 서경조의 초가 집에서 1890년대 기와를 올린 한옥 예배당으로 그리고 이것을 중축하여 기역자 형태로 만든 바 있다. 초기 교회는 이와같이 교회용도에 맞게 개욱하거나 신축한 건물이다. 예배당에는 일자형과 기역형이 있다. 일자형은 강대를 중심으로 좌우를 나누어 남녀석을 구분하고 가림막을 설치해 서로 볼 수 없게 했다. 여자석에는 강대쪽으로 가림막을 하여서 남자 설교자의 얼굴을 못 보도록 한 것도 많았다. 출입문도 다로 있었던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내외구별이 심했기에 메리 스크랜턴은 여성들만을 위한 교회를 만들기도 했다.기억형은 남자석과 여자삭을 기역의 날개에 분리시켜서 건축한 것이다. 이것들을 잘 보여주는 것은 경북영천에 있는 자천교회가 일자형 예배당을 잘 보여주고 전북 김제 금산교회가 기억형 예배당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또한 선교를 위해서는 그 지역과 잘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 한옥에 그 지역만의 문화를 섞은 모습들도 많이 등장했다. 성당은 사양의 문화와 기독교 전통을 한국의 문화 치 불교의 전통과 절묘하게 교합시킨 기념비적 건축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교과정에서 발생한 갈등

  1. 교파사이의 갈등

18세기 말부터 천주교가 , 19세기 말부터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좁은 곳에서 선교를 함께 하다보니 충돌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처음에는 서로 견재하는 정도였다가 감정싸움이 일어나면서 본격적인 세력대결과 교리논쟁으로 학대되었다. 이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1902년에 황대해 재령의 신환포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것의 시작은 1896년도에 황해도에서 천주교인들이 선교를 시작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선교는 점점 확장되었다. 개신교인들이 천주교인으로 바뀔 만큼 말이다. 이렇게 서로 상호간의 견재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천주교인들이 새 성당을 짓시 위해 개신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했다. 그것을 거부하자 천주교인들은 개신교인들을 구금, 구타했다. 이에 크게 분노한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관에 이를 알리고 외교적 개입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천주교는 대화로 해결하려고 했으나 개신교는 이 문제를 공론화하고 법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프랑스 공사가 개입해 황해도 지역 및 다른사건들과 함께 정치적, 외교적으로 타협했다. 이 사건은 천주교 선교사들이 치외법 남용, 여전한 반천주교적 정서, 지방 관리들의 부패 등으로 발생하게 되었다. 

이후 교리논쟁으로도 이어졌는데, 1907년 천주교 입장에서 개신교를 비판한 예수진교사패가 간행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예수의 참된 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네가지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개신교(정동감리교회 목사 최병헌)가 천주교에게 반론해 1908년에 예수찬주양 교양변론 이라는 책을 내었다. 이 책은 천주교의 여러가지 관습을 비판하고 개신교로 개종할 것을 권면하는 글이었다. 천주교인은 루터를, 개신교는 교황을 비판했을 정도로 둘 사이의 불편한 관계를 들어냈던 것이었다.

  1. 선교사들 사이에서의 갈등

선교사들이 올 때 당시 선교를 금지했었던 상황과 짧은 선교기간을 생각할 때 정말로 놀라운 결과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의 이면에는 외적인 박해와 내적인 충돌이 없지 않았다.먼저 내적인 문제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이것이 발생했던 이유는 바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견해에서 비롯되었다. 선교사들 대부분은 젊은 나이에 강한 사명감으로 선교를 온 사람들었다. 때문에 희생정신이 박혀있는 젊은이들은 서로의 의견을 굽하지 않았고 그로인해 갈등이 붉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감리교보다 장로교에서 더 심하게 나타났다. 특히 북장로교에서 심하게 나타났다. 북장로교는 감리교와 달리 사람이 많고 신학적으로 다양했기 때문이다. 북장로교는 크게 두가지로 나뉘었는데, 평양을 중심으로 모인 보수파와 서울 중심으로 모인 진보파가 있었다. 평양 선교사들(보수파) 출신의 사람들은 선교의 유일한 목적인 개종자와 교회를 만드는데에 집중해 의료나 교육을 부수적으로 여긴 반면 서울 선교사(진보파) 출신들은 의료나 교육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선교라고 생각한것에서 의견의 차이가 있다. 이런 식학적 차이는 이후 지정학교와 신사참배를 둘러싼 갈등으로 이어진다. 

또한 선교사들끼리 담당하는 지역이 없어서 지역이 겹치는 교끼리는 갈등이 발생했다. 그중 북장로교와 북감리교의 갈등이 가장 심했는데, 이는 일대에서 활동하는 것들이 필요이상으로 겹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 조정을 위해 협약을 통해 선교지를 분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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