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최초의 선교사
  2. 비밀 사업
  3. 조선에 소망을 품다
  4. 조선으로의 진출


최초의 선교사

선교가 조그마한 조선이라는 땅을 밟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우선 조선은 서구와의 통상을 거부했기에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가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또한, 조선은 중국과 일본과도 같은 강대국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고, 굉장히 복잡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에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다. 하지만 자국의 뜻과 달리 조선의 젋은 지식층이었던 개화파는 조선의 이념과 제도등의 개선의 필요성을 깨닫고 서구문명 중 기독교를 통해 이를 바꿔나가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조정에 여러차례에 걸쳐 개화를 위한 서구와의 통상에 대한 건의를 하며 개혁을 위한 노력을 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노력 끝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조선과 미국사이에 체결되며 굳게 닫혀있던 조선의 문이 열렸고, 여러 선교사들의 관심이 본격적으로 행동으로 실행되었다. 

가장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하였던 선교사는 개신교의 로버트 맥클레이(Robert Maclay)였다. 그는 자신의 부인이 가르치던 유학생들을 통하여 김옥균과의 친분을 쌓게 되었고 기독교를 가르쳤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김옥균은 조선으로 귀향하며 고종에게 맥클레이부부의 입국 승인 청원을 올렸다. 고종은 그들의 입국을  윤허하였고 이를 통하여 조선선교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선교사를 먼저 파송했던 것은 미국의 북장로교였다. 이수정이 많은 활약을 펼치며 선교사의 입국을 위한 노력을 했기에 다른 교단에 비해 먼저 추진될 수 있었다. 수많은 노력끝에, 1883년 11월 최초의 상주 선교사 알렌(Horace Newton Allen)을 조선에 파송하였다. 알렌은 선교사로서 입국한 것이 아닌, 미국공사관의 무급 관의로 입국했기에, 다른 선교사들보다 수월하게 조선에 들어올 수 있었다. 또한, 선교 활동을 하기에 앞서 알렌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때,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하여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았을 뿐만 공식적인 조선 체류가 보장이 되었고, 왕의 신임까지 받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알렌은 ‘조선왕립병원', 즉 ‘광혜원'을 1885년 4월 10일에 설립하게 된다. 하지만 26일에 ‘제중원' 즉, ‘사람을 구제하는 집'으로 이름을 바꾸고 의료선교를 실행하였다. 그는 한국의 의술을 비하하거나 깍아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이 그에게 호의를 보였다. 이는 그가 선교사의 사상 즉, 선교지의 문화를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외구분이 심하던 때의 조선이기에, 여성들은 제중원에 있던 남성의사에게 치료를 받지 않았다. 그렇기에 여성의사가 꼭 필요하던 시점에 여러 여성의사들이 와서 여성들의 진료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여성선교사의 특성상, 결혼을 한 후에는 선교사인 자신들의 남편을 보조하는 것이 쉬웠기에 대다수 사임하였기에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들 가운데서 하워드(Meta Howard)라는 북감리교의 여성의사가 1887년 11월 ‘보구여관'이라는 최초의 여성전용 의원을 지었기에, 여성들은 계속해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드디어 1885년 2월경이 되자, 미국에서 파송된 여러 개척선교사들이 조선의 땅을 밟게 되었다. 바로 북장로교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북감리교의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부부 그리고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Mary F. Scranton)모자였다. 또한, 헤론(John Heron)부부까지 1885년 여름에 모두 입국하였다. 입국한 선교사들은 크게 4가지의 직업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의사였던 스크랜턴과 헤론, 목사였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전문 여성선교사였던 메리 스크랜턴 그리고 부인선교사로 선교사들의 부인들이 있다. 


비밀 사업

여러 선교사들은 선교사라는 사명을 갖고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왔지만, 직접적으로 선교를 할 수는 없었다. 조선에서 그렇기에 의사들은 의료사업 그리고 목사들은 교육을 통하여 암암리에 복음을 전파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선교의 중점이 된 곳이 바로 제중원이다. 이곳에서 알렌과 헤론 그리고 보조로 언더우드가 일하였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의학을 배우려는 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하지만 모든이들이 이곳 제중원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스크랜턴은 이곳에서 잠시 일한 후, 사임하고 1885년 9월부터 자신의 집에서 진료를 시작하였다. 이는 제중원이 이미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장악되었기에 자신의 파송교단인 감리교를 위해 섬겨야했던 스크랜턴은 나올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교단구별은 신학의 다양성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여러 외국인 선교사들과 교단의 다양한 전통과 신앙으로부터 각 교파를 이룬 조선인 신도들은 교단별 교육을 받아오며, 서로 나뉘게 되었고 이를 통한 조선교회의 교단분열은 심해져갔다. 

의료사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선교사들은 교육사업도 시작하였다. 학교설립을 주도한 것은 바로 아펜젤러와 메리 스크랜턴이었다. 고종은 각기 그들의 학교설립을 승인했지만 학생들을 모집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서양인들이 학교에 보낸 자신들의 아이를 잡아먹는다와 같은 소문들이 조선인들 사이에서 돌았기 때문이다. 이는 병인박해로 인하여 서양인들에 대한 안좋은 인식이 조선인들 사이에서 자리잡고 있었기에 일어난 일이다. 결국 고종은 그들에게 각기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수여하고, ‘기수'라는 호위병을 보내어 그들이 왕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렸다. 이와 같은 요소들을 통하여 그들의 학당은 조금씩 조선 사회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아무리 조선사회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도 자신들만의 터전이 필요할 때에 그들은 서울 정동에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형성하였다. 그들의 모국과 같다는 선교구내에는 선교지부와 선교사들의 거주지, 병원, 학교가 설립되어 있었고, 이곳은 선교사 자신들의 고국과 거의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모든 선교사들이 이와 같은 시설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제중원이 정동에 있지 않았기에, 북감리교와 같은 선교구내를 갖지는 못했다. 하지만 1886년 5월 언더우드가 정동에 고아원을 만들며 이를 점차 선교구내의 형태로 발전시켜나아갔다. 

1894년 즈음에는 제중원의 원장 애비슨(Oliver R. Avison)이 무능력한 조선관리들을 제중원의 운영에서 배재시키기 위해 정부에게 제중원의 운영과 인사의 자율권을 요구하였다. 조선정부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정부의 소유인 제중원의 건물과 대지를 반납하라고 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애비슨은 새로운 병원을 설립하는데, 이가 바로 1904년 조선 최초의 근대식 종합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이다. 


조선에 소망을 품다

선교가 여러 차례로 조선이라는 땅에 진행되자 북감리교와 북장로교뿐만 아닌 다른 선교사들도 조선으로 들어오기를 희망했다. 많은 소망중 가장 먼저 조선에 진출한 것은 다름 아닌 영국성공회였고, 그를 따라 차례로 다른 영연방국가의 선교사들도 입국을 시작하였다. 이는 영국이 조선과의 조약을 체결했기에 외교관이 자국선교사들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1893년에 입국하였던 선교사들 중, 맥켄지(William J. Mckenzie)선교사는 유일하게 한국인들 사이에서 그들과 더불어 살았던 선교사이다. 그는 그들과 함께하며 수많은 위기 속에서 교인들을 지켰다. 그의 희생적인 죽음으로 인해 깊게 감명받은 캐나다장로교부터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의 땅을 밟게 되었다.  그들 중에서도 캐나다 소속의 게일이 대한기독교회라는 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1889년에는 호주에서도 선교사가 파송되기 시작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특히 여선교연합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여성선교사인만큼 여성들을 위한 사업을 주도하였다. 그들이 남부지방에 최초의 선교여학교였던 일신여학교를 설립한 것도 그들의 선교의 목적과 알맞은 계획이었다. 


조선으로의 진출

1886년의 조불조약 이후, 선교사들은 의료 및 교육활동말고도 조금씩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는, ‘언어 ·과학 ·예술 ·법률을 연구하고 교회(敎誨)하려고 조선에 가게 되는 프랑스인의 신분을 보호한다’라는 조약을 넣어 선교를 목적으로 일을 행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서 프랑스의 선교사들은 특권과도 같이 선교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신분도 숨기지 않고 아주 적극적이고 공개적으로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또한, 많은 반기독교 시위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1890년 초부터 내륙 진출을 실시하였다. 이는 북미 및 호주에서 진행되었던 청년,학생 해외선교운동의 영향이 매우 컸는데, 이러한 청년주체의 집회들을 통하여 파송된 선교사는 총 4천 3백여명이 넘는다. 이를 통하여 가장 보수적인 신학을 중시하였던 미국 남장로교의 “7인의 개척자"도 조선에 들어오며 초기 한국교회와 신학형성을 위한 많은 노력을 하였다. 동시에 선교사 파송도 시작하였는데, 이는 미국에서의 유학을 통해 기독교적인 영향을 받은 윤치호가 주도한 것이었다. 그를 통하여 중국에서 일하던 여러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파송될 수 있었고, 이들은 점차 강원도로 자신들의 선교지를 확장해나아갔다. 그들을 따라 다른 여러 선교단체들도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파송시켰다. 이는 불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자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멈추지 않았다. 또한, 1893년의 윌리엄 홀과 모펫은 첫번째 거주자들로서 선교를 지속해나아갔다. 

1890년대에 들어서 입국한 선교사들은 거의 내륙에도 모든 문이 열린 것 마냥 선교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가 20세기로 접어들며 선교사들은 한국 어디에서든 매우 자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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