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1980년 이후 한국 개신교의 성장
  1. 삼박자 축복, 번영신학
  1. 1960년, 해외선교의 그림자
  1. 1960년부터 2000년대까지의 에큐메니즘



1980년 이후 한국 개신교의 성장

1960~1980년대, 한국 개신교의 성장세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이 시기의 한국 개신교의 성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시기 교회 수는 7배 증가했고 교인 수도 1960년 1백만 명에 훨씬 못미쳤다가 1985년이 되서는 650만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 성장으로 특별히 눈에 띈 점은 성결교나 침례교와 같이 규모가 작았던 교파들이 큰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때 성결교는 1950년부터 1990년까지 10만명에서 60만명으로 성장하면서 장로교와 감리교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교세를 가졌다. 침례교의 경우에도 전국의 교회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1960년대 전국 교회 수가 2백여 개에 불과했지만, 1984년에 1천개가 넘는 교회가 세워졌다. 이 시기의 한국 개신교는 역사상 유례없던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앞으로의 성장이렇게 폭발적으로 성장한 이후 현재는 어떤가? 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 들어서자 급속도로 개신교 인구수가 감소하고 있다. 그 감소의 부분적인 원인으로는 한국의 저출산의 영향에 따라서 교회 안에서도 청소년들의 인구수는 줄어들고 노인들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극히 부분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출산율의 영향보다 지금 이 쇠퇴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1970년은 교회의 양적인 성장 뿐만 아니라 국가의 경제도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시기이다. 이렇게 양측의 성장이 맞물려서 이때부터는 교회들이 양적 성장에 중심을 두고 활동하는데, 특히 헌금과 선교를 강조하면서 양적 성장에 대한 욕망이 눈에 띄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재정 확보와 교회당, 그리고 교인 수를 더 크게 성장시키도록 방향을 잡은 것이다. 또한 은사 운동도  많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은사 운동은 여러가지 부조리함을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자연스럽게 신학적으로 어긋난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인데, 은사만을 강조하면서 복음으로 회개하는 것보다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기적만을 바라본다. 여러가지 은사를 존중하고 인정하라는 성경말씀에 철저히 위배되는 현상을 낳은 것이다. 이렇게 1970년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만을 추구하는 부조리함이 여러가지 현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로 발생한 또 다른 문제점이 바로 기복 신앙이다. 양적 성장과 은사 운동을 추구하는 것이 곧 교인들을 신앙의 겉모습만 눈에 불을 키게 하는 것이고, 그 내면의 변화는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환경이 갖춰진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이 교회라는 공간에서 공동체적으로 추구되는 방향이라면,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본질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앞서 2000년대 한국교회 쇠퇴기의 원인들에 대한 분석에 따르면 지금의 한국교회 쇠퇴기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의 교회 성장과 관련된 현상이란 것을 짚어보고자 한다. 그 당시의 성장은 본질을 잃어버린 양적이고 경쟁적인 성장이었다는 것이 바로 지금의 한국 교회 쇠퇴기의 시발점이라고 보는 것이다. 일시적인 양적 성장은 겉모습에 비치는 모습일 뿐이었다. 그 이후부터는 당연하게도 점점 쇠퇴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한국교회도 본질을 잃어버리고 세상적인 이익을 위한 성장에 부패되었다는 것을 보면 1960년대의 양적 성장의 부조리함을 짚어보는 것이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상황과 종교적 상황의 밀접한 관계따라서 한국 교회가 쇠퇴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교회의 규모, 경쟁적 교세 늘리기 등의 표면적인 활동이 아니라 교회가 세워진 본래 목적인 회개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교회는 양적 성장을 위해 전도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질을 잃어버린 종교적인 전도는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에는 그 사회적 상황이 종교적인 전도만을 강조해도,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시기이다. 국가적으로 개발독재라는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시기에서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것은 당연했다. 또 그에 맞춰 종교들은 더 활발히 운동하고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사람들은 단지 심리적 안정감을 회복하는 데에 그쳤다. 기독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더 이상 기독교라는 종교를 열심히 다녀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 단순히 종교적인 운동만으로 사람들이 교회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1960년대의 전도방법이 현재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예전과 비교해서 살만하기 때문일까? 동시에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나라를 잃게 된다고 해서 독립운동을 하게 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러한 질문에 따라 1900년대부터 2000년대 현재까지의 사회적 배경과 양상은 매우 급변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종교활동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1970년대의 개발독재라는 힘들었던 시대적 상황에 따라 사람들이 자연스레 종교를 찾은 것처럼 현재도 그렇게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 전도가 끊김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물론 그 와중에 1970년대와 같이 본질을 잃어버린 양적인 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은 충분히 배척해야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급변하고 있는 190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시대적 상황을 보면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하는 것으로 교회가 사회와 분열되고 대립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1960년대와 비교하여 현재는 무작정 전도만으로 사람들을 교회로 들여올 수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가 사회와 대립될 때, 교회는 전도를 성공하기 매우 힘들다. 그렇다면 교회와 사회 간의 대립을 완화시키는 것이 교회의 양적 성장과 동시에 본질적인 전도를 시도할 수 있는 것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 다음으로 대립을 완화시키기 위해 생각해야할 것이 있다.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중 하나는 기독교가 비윤리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본래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는 철저한 윤리의식이 내포되어 있으며, 실제로 기독교 윤리를 바탕으로 사회의 인권이 회복되는 등의 역사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기독교가 아닌 세상에 속한 사람들도 당연히 기독교라는 종교는 사회에 많은 공헌을 하고 봉사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돌봐주는 등의 그러한 공익 단체, 선한 단체라는 인식이 잡혀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따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게 되는 이유는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철저히 반대될 때이다. 바로 교회 안에서 사회에 반하여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들은 항상 사회성과 윤리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대적 상황을 읽고, 윤리와 본질이 철저히 지켜진 상황에서 전도행위가 이루어질 때 사람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교회를 찾게 될 것이다. 


삼박자 축복, 오순절파의 번영 신학

1960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 개신교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그 성장요인 중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오순절파가 있다. 오순절파의 성장비결인 삼박자 축복을 번영 신학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본 글을 써보도록 하겠다. 

오순절파, 그 시작오순절교회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같은 은사주의를 강조하는 개신교 내의 한 교파이다. 따라서 오순절교회를 곧 오순절교파라고도 표현한다. 오순절교파는 먼저 1928년 한국에 처음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활동역사는 굉장히 미미하기 때문에 이후 본격적으로 오순절파가 한국에서의 처음 시작하게 된 배경을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 첫 시작은 바로 1953년 4월 8일 제1회 창립총회를 개최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첫 시작이면서도 현재까지의 대표적인 오순절 교회라고 본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는 조용기 목사를 책임자로 두었고, 그는 실질적으로 처음 시작을 담당하면서 이후 교회 성장의 주역이 되었다. 오순절 교회는 한국 사회에 오순절운동 확산의 중심이었다. 이것이 발전하여 오늘의 여의도순복음 교회가 되었고,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한국의 최대 교회일 뿐만이 아니라 세계에서도 제일 큰 교회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의 오순절파의 규모는 장로교, 감리교를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를 보여주고 있다. 

삼박자 축복의 발발1960년, 오순절파의 부흥은 삼박자 축복의 이념 때문이다. 삼박자 축복이란….개발독재라는 시기에 개인의 삶의 질이 향상하는 것은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런데 종교에서 물질적인 축복과 현세에서의 내게 오는 축복을 약속해주는 것은 그 시대의 필요를 채워주는 마치 가려운 등을 긁어주는 것 마냥 사람들은 자연스레 교회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삼박자 축복"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삼박자 축복과 같은 이념을 가지고 종교적 성장이 이루어진 곳은 이렇게 오순절파 뿐만이 아니다. 다른 교회는 물론이고 불교 등의 다른 종교에서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삼박자 축복과 같은 현재의 세상에서 복을 받게 되는 종교 이념은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 

삼박자 축복과 번영신학의 공통점 성경에서는 가난하고 병들고, 아프게 살아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성공이 목적이 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자칫 번영신학의 개념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성공은 무한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할 수단일 뿐이다. 하나님 나라가 아닌 세상의 복에 치중하는 것은 죄를 짓게 하는 근원이며,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해치는 것이라고 본다.  

신앙생활은 나를 부정하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것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이란 이미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과 죄가 가득한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눈앞에 보이는 방언이나 은사나 교회성장과 같은 번영을 위한 신학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산다는 것은 명확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묵상하며 살아가야 한다.


1960년, 해외선교의 그림자

지금까지 책의 내용을 보면, 1960년 한국 개신교의 폭발적 성장의 수많은 이유들을 각각 다양한 관점으로 보고 해석한 내용을 풀어적은 것이다. 이번에는 또 다른 관점으로 ‘해외선교'가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이것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해석할 수 있는가를 가지고 글을 써보았다. 

1960년대, 해외선교는 양적 성장의 일부분해외선교는 교회 성장에 따라 자연스럽게 증가했다. 그러나 해외선교가 교회의 성장에 따라 함께 성장한다는 점에서, 교회의 성장주의와 물량주의가 선교운동까지도 부작용을 일으키게 되었다. 파송 선교사 수가 교회의 규모를 말하는 척도로 인식되면서 대부분의 교회들이 선교사들을 양적으로 많이 보내는 것만 집중했다. 각각의 선교사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조금만 해서 더 많은 선교사를 배출하게 하는데 이렇게 양적인 선교사를 많이 채용하다 보니까, 제대로된 마음가짐 없이 선교사가 되는 사람도 많이 생기게 되었다. 그렇게 자연스레 본래 선교의 참뜻은 사라지고 말았다.

     성장주의, 물량주의의 성장은 과연 의미가 있는가 그 당시에는 나라에서부터 GNP성장에 대한 가치가 지배해있었는데, 교회에서도 똑같이 성장에 대한 가치가 지배해 있었다. 마치 시장경제적 무한경쟁과 같은 모습이 세상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그런 모습이 지배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하는 설교도 교회 성장에 대한 설교가 많았는데, 누가복음 14장 23절의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라는 말씀을 기반으로 하였다. 위와 같이 전도가 강조된 자체는 표면적으로 좋아보이는 현상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의 본질적인 전도수행이라기보다는 교회 성장에 보다 큰 강조점을 두었던, 교회의 수적 확장을 의도한 것이었다. 

실제로 조용기 목사의 서울 여의도순복음 교회는 당시 성장하는 교회의 모델이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 과정에서 “교회만 성장한다면 신학은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야기도 있다. 

성장주의, 물량주의 성장, 그 후1960년대부터 1980년대는 한국교회가 가장 크게 성장한 시기였지만,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가장 망각된 시기였다. 그렇기에 표면적이었던 양적 성장은 오래갈 수 없었다. 1980년대 들어 한국교회의 성장은 서서히 둔화되었으며, 1990년대 중반부터는 교세가 정체하거나 감소했다. 2005년도 인구센서스에 따른 개신교인 수는 약 861만명 이었다고 하는데, 이 수치는 벌써 10년만에 14만여명이나 줄어든 수치이다. 

부흥과 교세 확장의 차이1960년대 개신교의 폭발적인 성장은 부흥일까? 단지 교회가 성장한 것일까? 한국의 초기 부흥운동과 60년대 부흥운동의 차이점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60년대 부흥운동은 인위적인 양적 성장으로 인한 삶의 변화가 없었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고, 초기 부흥운동의 경우, 통회로 인한 회심과 삶의 변화가 인위적인 노력이 없이도 교인 전파와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겠다. 


1960년과 2000년대의 한국 개신교들의 에큐메니즘

1960년, 에큐메니즘2010년대에 기독교한국루터회가 교회협의회에 가입하였다. 이들의 합류는 두 가지 결과로 바라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에 보수적 성향의 교단이 참여했다는 것과 두 번째는 운동의 범위나 영향력이 개신교를 넘어섰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에큐메니컬 운동은 개신교를 넘어 천주교와의 교류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2000년, 에큐메니즘이렇듯 에큐메니즘, 혹은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에 꼭 필요한 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그 중요한 이유를 다시 생각해본다면 이 운동이 부분적인 신앙이 아니라 온전한 신앙을 위해 그리고 분열된 교회에 반대되는 온전한 교회를 위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적과 뜻을 실현하기 위해 에큐메니즘운동은 교회 일치라는 것을 위해 교회의 봉사, 선교 및 변혁에 많은 공헌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운 에큐메니즘 운동의 모습은 벌써 1900년대의 옛날 이야기에 불과하다. 최근 몇 십년동안 교회일치, 봉사, 선교 및 회복의 통합적 비전이 약화되었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교회의 본성, 일치와 선교에 대한 교회일치운동의 재생이 필요하다. 

교회일치운동의 재생을 위해서 우리가 짚어볼 점은 교회일치 운동이 겉으로만 시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본래의 교회일치 운동의 목적이 전혀 실현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첫째, 정체성에 초점을 두는 교회들은 각각 자기들만의 기독교 전통과 신학을 강조한다. 그래서 교회일치 운동을 하는데 모두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선교에 대해 얼마나 긴급하게 생각하는지가 각자의 전통과 신학에 따라 다르다. 셋째, 에큐메니즘에 참여하는 교회들의 교회본성, 교회일치 및 선교에 대한 다양한 이해 및 확고한 입장은 교회별 전통과 신학의 다양성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이 교회일치운동의 본질을 해치는 것이 아닐까? 

위 사실을 본다면 에큐메니즘의 본질을 되찾기 위해서 교회는 다양성, 통일성, 선교라는 세 가지의 요소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교회의 선교가 더욱 효율적으로 될 수 있다면, 복음에 대한 표현이 다양한 것이 과연 다 옳은걸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교회의 선교, 즉 교회의 믿음과 실천에 대한 다양한 표현 및 증언들을 모두 참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걸까? 아니면 교회의 어떤 특정한 표현 및 증언만이 참된 것일까? 

위 질문들은 각 교회들의 다양성을 모두 인정해주는 게 맞다고 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들이다. 우리가 다양성을 인정하는 한계는 진리를 위범하지 않아야 한다. 교회전통이 전달하는 진리가 왜곡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통일성이 없는 다양성은 무질서와 분열로 나아가며, 다양성이 없는 통일성은 균질화와 획일성으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현재의 교회일치가 어떠한 정착되어 있는 또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라는 것, 획일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칼뱅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공동체교회일치의 본질은 칼뱅의 교회론, ‘교회의 본질 회복'의 글을 통해 알아볼 수 있었다. 이것은 교회일치의 본질과 교회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들은 성령으로 공동체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칼뱅은 기독교강요 제 4권의 서두에서 “모든 경건한 자들의 어머니로서의 참된 교회와 우리는 항상 연합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한분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예배한다고 고백하는 세계 각처에 흩어진 전체 무리를 가리킨다.” 이 말에 의하면 교회 공동체는 분열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본질을 찾는다는 마음가짐이 통일성(또는 획일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령으로 공동체를 이루면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받는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연합과 협력을 위한 에큐메니즘 운동은 지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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