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한국의 신학이 등장하다
    1) 토착화 신학
    2)민중신학
    3)해방신학
  2. 새로운 신학이 들어오다
    1)신복음주의
    2)사회 참여에 관심을 보인 기독교인들
  3. 교회의 선교
    1)도시산업선교
    2)빈민선교와 농민선교




한국의 신학이 등장하다

1) 토착화 신학

한국 교회는 해방 이전부터 해방 후까지 서구의 신학을 그대로 수입하여 사용하였고 그러한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외인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류영모였다. 류영모는 노장사상과 불교를 포괄한 천일합일을 통하여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함석헌, 김흥호, 이현필, 류달영 등에게 영향을 주어 각 분야에서 뜻을 펼치도록 도왔다. 하지만 그는 예수를 그저 본받아야 할 선생으로 여겼고 교회 제도라는 벽의 밖에 있었다. 1960년에 그는 교회 제도 안에서 한국적 신학을 만드려고 노력하였다. 

한국 기독교계의 토착화 신학은 감리교 신학자들이 주체가 되어 진행하였다. 그 중 유동식, 윤성범은 복음의 본질을 한국적으로 표현하자는 토착화 신학을 주장하였는데 신학자들은 유동식, 윤성범을 향하여 복음의 토착화는 불가능한 것이라며 비판을 하였지만 유동식과 윤성범은 노력 끝에 풍류신학과 성신학을 만들었다. 

유동식의 토착화 신학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린 계기가 되준 사람은 바로 인도의 감리교 감독인 나일즈(D.T.Niles)였다. 그의 아시아 기독교에 대한 내한 강연은 유동식에게 힘을 불어넣었고, 그는 “복음의 토착화와 한국에서의 선교적 과제"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토착화 신학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한 논쟁에는 여러 명의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윤성범은 박봉랑과 토착화 신학에 대한 논쟁을 펼쳤다. 이들은 단군신화를 해석하며 논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윤성범은 단군신화의 단군이 하나님이며 환인, 환웅, 환검이 동방 교회 삼위일체론의 영향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윤성범의 주장에 대해 박봉랑은 터무니 없는 주장이며 단군신화 속의 삼위일체론과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전혀 관련이 없다며 반박하였다. 또한 그는 성서만이 유일한 기독교의 원천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민족의 문화, 신화 등과 기독교는 단절되어있다는 것이였다. 이 외에도 윤성범의 주장에는 여러 반론이 있었고, 단군신화 해석은 “예비작업"이라고 하며 물러섰다. 이러한 그들의 논쟁은 문화계와 학계에도 관심을 끌었다.

그후 유동식과 윤성범은 각자의 방법으로 토착화 신학에 대하여 연구해나갔다. 그 끝에 윤성범은 1970년에 성신학을 발표하였다. 성신학은 유교의 성과 요한 복음의 성육신은 서로 같은 개념이라는 주장이였다. 즉 유교의 경전에 나오는 핵심 개념인 율곡의 사상 성이 요한 복음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성육신과 같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하여 장로교 대표 이종성은 비판을 하였고, “성서적 토착화" 에 충실할 것을 권하였다. 

유동식은 1980년대, 풍류신학을 제창하였다. 풍류는 이두식 한자로 우리 말의 불(夫婁)이며, 광명, 태양 등의 뜻을 가진다. 유동식의 풍류 신학은 한국무교의 원형을 풍류에서 찾고 기독교의 복음을 풍류가 가진 뜻인 빛으로 해석하는 식이였다.  이는 풍류라는 한국 사상을 바탕으로 기독교를 재해석한 것이였다. 그는 풍류는 기독교 이전에 들어온 복음이며 기독교는 풍류를 바탕으로 토착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윤성범의 성신학과 유동식의 풍류신학은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확실한 것은 이들의 신학이 서구와는 다른 주제를 가진 것을 보여주었다. 서구 신학은 화해와 해방이 강조되었다면, 이들의 토착화 신학은 죄와 구원보다 조화와 멋이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민중신학

1960년대에는 토착화 논쟁에 불이 붙었다고 할 수 있다면 1970년 대는 민중신학에 불이 붙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기독교는 활발하게 전개되는 민주화 운동 가운데에서 민중신학을 대동시켰다. 민중신학은 1960년대 이후 한국 상황에 알맞는 신학이라는 점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1970년대 유신체제 속 한국의 정치적•경제적 현실은 민중신학의 사회적 배경을 제공하였다. 민중신학은 민중이 처한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민중과 함께하는 과정 속에서 신학적으로 풀어서 내놓은 것이였다. 서남동과 안병무는 민중신학의 이론을 정립하는 것에 대하여 큰 힘을 주었다. 당시의 민중신학자들은 여러 차례 모여 민중을 주제로 삼아 논의하였다. 

서남동은 민중을 신학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성서에 나오는 예수와 함께하던 무리를 소외당한 민중으로 보고 그들에게 주목하였다. 그 후에 서남동은 다양한 사회과학적 성서해석 방법을 수용하였고, 그 결과로 “성령론적 통시적 해석학"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안병무는 민중은 민족의 실체라며 주장하였다. 그의 관점으로 바라본 신학은, 민중이 예수가 일으킨 사건의 주체이며, 하나님이 행한 선교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민중은 민족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이며 민족의 실체라고 하였다. 하지만 지배계급이 민족의 이름으로 민중을 수탈하였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민중운동이 지속되었다. 그는 홍경래사건, 동학혁명, 3.1운동, 4.19혁명 등을 민중운동의 전형으로 내세웠다. 그의 신학적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주목을 받았다. 

서남동과 안병무가 민중운동을 떠오르게 하는 동안 현영학은 탈춤에서 해학성과 같은 “종교적 비판적 초월성"을 찾았다. 또 김용복은 사회전기 개념을 통하여 민중의 고난과 자기해방을 풀어내려고 노력하였고, 서광선은 무속신앙에서 민중신앙의 형태를 드러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와 같이 민중신학은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제대로 정착한 것은 1970년대 말이었다. 여러 학자들이 민중신학에 대하여 논문을 쓰기 시작하며 한국이 만들어낸 고유한 신학으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며 민중신학의 열기는 퇴조되었다. 민주화로 인하여 군사정권이 퇴각하고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되는 등과 시민운동의 부상으로 인하여 민주화 운동과 함께한 민중신학의 의의는 급격히 상실되었다. 21세기에도 한국민중신학회, 민중신학연구소 등이 맥을 잇고 있지만 이전과 같은 큰 관심을 받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민중신학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한국의 상황 속에서 창조적으로 신학화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3)해방신학

해방신학은 1960~70년대에 라틴아메리카의 가톨리교회에서 생겨난 신학이였다. 해방신학자들은 민중에게 고통을 주는 경제적 불평등, 실업, 가난 등을 근본적인 문제로 보았다. 이들은 사회의 억압과 종속에 대하여 해방하는 것이 주된 과제였다. 

이러한 해방신학은 1970년대 초 국내에 소개되었다. 하지만 해방신학은 천주교에서 약간의 관심을 보인 것 이외에는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천주교 측도 관심을 가지긴 하였지만 깊이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해방신학은 수심위로 떠올랐다. 해방신학이 관심을 받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을 비판하는 진영이였다. 보수 성향의 학자들은 해방신학의 확산을 걱정하여 해방신학을 비판하였는데 이는 해방신학이 다시금 떠오르게 해준 주요 발판이 되었다. 

해방신학이 국내로 유입될 수 있었던 배경은 남미와 유사한 배경을 가진 남한의 정치적 배경이였을 것이다. 당시 한국 사회는 소득격차 심화, 노동운동 탄압, 언론자유 등에 대한 제약을 받았고 한국 기독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해방신학을 전개한 것이였다. 그렇기에 해방신학은 한국의 시대적 상황이 불러온 신학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해방신학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퇴조하였는데 그 이유는 1987년 정부의 대통령 직선제 수용으로 인하여 완화된 정치사회적 긴장이 해방신학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1997년 IMF사태를 계기로 해방신학에 다시 관심을 보였지만 그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새로운 신학이 들어오다

1)신복음주의

미국의 보수적 교회는 현대사회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신복음주의이다.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의 폐쇄성과 분리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에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한국교회들은 대부분 이에 대해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신복음주의가 신학과 과학을 조화시키기 위하여 사회복음을 받아들인 점 등을 근거로 그들을 비판한 것이다. 

하지만 근본주의적 신학은 사회적기여를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근본주의 신학에 얽매여 있는 보수적 교회는 시간이 흘러 변하여 가는 역사와 함께하지 못하고 점점 소외되어져 갔다. 근본주의적 신학은 신앙과 삶을 함께 고민하는 크리스쳔들에게 답을 제공해주지 못하였다. 

이러한 근본주의의 한계를 느낀 한국 보수교회는 새로운 보수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는 바로 신칼뱅주의(Neo-Calvinism)이였다. 신칼뱅주의는 온 우주가 하나님의 나라이고 기독교인들은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게 할 의무를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삶에 있어서 각 영역 속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하도록 힘을 부여했다. 신칼뱅주의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함께 국내에 유입되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교회 내 이원론적 가치관을 바로 잡고 세상 속에서 기독교적 문화를 만들어나가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심어주었다. 


2)사회 참여에 관심을 보인 기독교인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하나님의 역사에 함께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게 해주었는데 이는 모든 영역에서 성경적인 가치관이 실현되도록 노력해야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1987년의 6월 항쟁 이후 복음주의권의 사회참여 신학은 사회참여에 나서게 하였다. 참여적 복음주의자들은 1987년 말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시작하였고, 1989년 경제 정의실천시민연합 결성을 주도 하였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1986년 5월에 “현 시국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제언"을 발표하였는데, 이 성명서는 신앙과 삶이 사회 안 모든 영역 안에서 나타나게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대학기독신문」은 1980년대 후반 보수 교회인들의 사회참여을 주도하였다.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인 주로 중도파와 보수파의 영향을 받았는데, 시간이 지나며 진보적인 입장도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인들은 여전히 근본주의적 신학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세상은 빨리 변화하고 있다. 한국 보수교회의 미래는 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한국 상황에 맞는 신학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은 보수교회에게 큰 과제일 것이다.


교회의 선교

1) 도시산업선교

 1960~70년대에는 사회경제적 약자가 급증하였다. 그렇기에 교회의 선교도 변화하여 갔다. 노동자와 빈민 등에 대한 선교는 교회가 민중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였다. 본격적인 교회의 산업선교는 1957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시작하였다. 그 뒤를 한국기독교장로회(1963년), 구세군대한본영(1965년), 기독교대한복음교회(1973년) 등이 이었다. 

산업 선교는 초기에는 복음 전파를 위해 시작되었다. 전도 방법은 복음 전파라는 주제와 맞게 예배, 성경공부 등의 방식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노동자 교육, 노동조합 조직 지원 등 노동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선교 실무자들은 노동 현장에서 직접 노동자들과 생활하며 지냈다. 이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직접 이해하며 피부에 닿는 말씀 선포를 하기 위함이었다. 1968년부터는 산업전도에서 도시산업선교로 명칭을 바꾸어서 활동하였다. 

도시산업선교는 1970년대 초반에 노동조합을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했다. 기독교 산업선교 단체들은 개별 기업에게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단체였다. 이들은 1970년대 정부, 사회로부터 소외 받던 산업 노동자, 여성 노동자들을 돌보았다. 이는 한국교회의 선교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이었다. 

정부는 도시산업선교 활동에 대해 끊임없이 방해하고 간섭하였다. 그들은 산업선교 활동을 공산주의자들의 노동계 침투라고 비난하였다. 이렇게 산업선교를 공산주의 활동이라고 지속적으로 비난을 하자 교회는 산업선교의 신학적 근거를 밝히는 작업을 시행하였다. 그 후 1978년 9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 산업선교 신학선언”을 발표하였는데 이 선언은, 도시산업선교는 짓밟힌 인권을 회복시키며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계약(마 20:13)을 이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각 교단과 산업선교 단체, 기독교 여성 단체들 등도 단체를 조직한 후 산업선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2) 빈민선교와 농민선교

산업선교와 함께 활동한 선교활동은 빈민선교였다. 1960~70년대의 경제개발 정책은 공장 노동자 수요를 급증시켰고, 이는 농어업 종사자들을 이주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이주한 사람들은 대도시로 몰려들어 도시 빈민촌을 형성하였다. 도시 빈민층이 증가됨에 따라 교회에게는 도시빈민을 위한 선교라는 과제가 생기게 되었다. 

1968년 9월 도시빈민선교는 연세대학교에 도시문제 연구소가 설립되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연구소는 도시빈민선교 실무자를 훈련을 해주고 선교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이 방법론과 함께 빈민가에서 도시빈민선교가 이뤄졌다. 그 후 도시빈민 문제가 더 폭발하자 더욱 활동적이고 강화된 빈민선교 기구의 결성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1971년 9월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가 조직되는 등 도시빈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회의 노력은 계속 되었다. 처음에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전국으로 확대되어 지방과 농촌에서도 활동하였다. 그러나 1979년 한국특수지역선교위원회가 해체되며 도시지역 빈민선교 활동은 종료되었다. 

이렇게 도시에서 산업선교와 빈민 선교가 진행되는 동안 농촌에서는 농민선교가 시작되었다. 급속한 산업화 정책은 농촌의 인구 대부분을 도시로 이주시켰고 정부가 시행한 저곡가 정책으로 인하여 농민들은 더욱 힘든 나날을 보냈다. 천주교는 이에 대해 빠르게 관심을 가졌고 1966년에 가톨릭농민회를 조직하고 지역별로 활동을 하다가 1972년부터 전국적으로 활동하였다. 1974년에는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농민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교육은 농민 운동가들에게 이론적 기반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78년 3월에는 전남기독교농민회가 결성되었다.  이 뒤를 이어 기독교농민회도 조직되었다. 1982년 3월에는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농민운동, 민주화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은 1989년, 한국기독교농민회로 이름을 바꿔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1970~80년대, 교회는 산업화로 인해 생긴 여러 문제들을 선교를 통하여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은 고통을 받던 노동자, 빈민 등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았으며 군사정권과 대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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