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한국 전쟁 직후의 북한 기독교
  2. 가정 예배의 발전
  3. 반종교선전과 조선 기독교 연맹의 활동
  4. 북한 교회의 변화
  5. 지하교회의 현실



반종교 선전과 조선 기독교

연맹의 활동1972년, 북한은 1948년 최고인민회의 당시에 제정한 헌법을 개정했다. 이 헌법은 ‘사회주의 헌법'이라고도 불리는데, 북한 스스로가 사회주의 국가임을 선언하고 사회주의 국가에 맞는 법을 마련한 것이다. 북한은 주석제를 도입하여 김일성의 1인 정치 체제를 헌법적으로 보장하게 된 것이다. 또 그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로동당의 공식 이념인 “조선노동당은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주체사상, 혁명사상에 의해 지도된다” 라는 ‘김일성주의'를 이때 정립했다. 종교에 관하여  이 헌법은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선전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규정했다. ‘신앙의 자유' 라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반종교선전에 더욱 큰 무게를 두었다. 각종 대중 매체들은 종교와 관한 내용을 매우 왜곡되게 표현하여 반종교선전을 선동했다. 예를 들어 북한의 대표 신문인 ‘로동신문' 에서 비 인륜적인 선교사들의 모습을 비판했고, 친미 세력이였던 주인공이 한국전쟁을 경험하며 반미 세력으로 넘어가는 이야기를 담은 ‘최학신의 일가' 등 여러 영화 및 연극에서도 비과학적인 종교의 모습을 비판했다. 이 반종교선전은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1981년에 발행한 북한의 대사전인 현대조선말사전에서는 선교사는 ‘미제를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이 예수교를 선전하고 보급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나라에 파견하는 종교의 탈을 쓴 침략의 앞잡이’ 라고 서술했고, 구약성서는 ‘예수가 나기 전의 기사를 모았다고 하는 예수교의 성서, 깨지 못한 사람들을 끌기 위한 비과학적인 허황한 거짓’ 이라고 서술했다.

이렇게 북한 내부적으로는 기독교에 대한 압박이 계속되었지만, 북한 외부적으로는 종교 제제를 완화시키는 것처럼 선전했다. 1972년 7월 4일,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 통일과 관련해서 합의한 ‘남북공동성명' 의 발표로 북한과 남한, 서구 나라들의 교류가 점차 시작되었고, 종교가 없는 북한을 이상하게 여겼던 서구 나라들의 영향과 국제 사회의 비판이 원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잠시 활동을 멈추었던 조선 기독교도 연맹(조기련)이 이때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조기련은 1972년에 22년만에 다시 3년제의 평양신학원을 개원했다. 안수를 받은 조기련 소속의 목사들이 교수를 맡아 전도사, 목사를 양성했다. 이러한 평양신학원 재건은 북한에 기독교를 널리 전파하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평양신학원은 1980년대 말까지 약 20여명의 목사를 배출했다. 조기련은 신, 구약성서와 찬송가를 현대어법에 맞게 발행하기도 했다. 이 성서는 남한의 성서와 중국어 성서 등을 조합해 일부 표현을 북한식 표현으로 수정해 만든 것이다. 성서가 널리 전파되어 있지 않았던 북한으로써는 성서를 만들고 전파하는 일이 제일 시급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성서를 소지할 수 없었던 북한에서 이 성서와 찬송가는 약 1만권이 발행되었다. 당시의 북한의 개신교 신자가 약 1만여명 쯤 되었으므로 이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성서를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기존에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서로 다른 번역의 성서를 사용하고 있던 북한 기독교인들에게 통일된 성서와 찬송가 발행은 큰 도움이 되었다. 

조기련은 가정교회 또한 더욱 활성화 시켰다. 10명 안팎으로 구성된 가정교회는 전국에 그 수가 500여개 정도 되었고, 전도사, 집사, 장로 및 평양신학원을 졸업한 목사들이 봉사하고 있었다. 이 가정교회는 장로교 방식대로 예배가 운영되었다. 이렇게 북한 내부 뿐만 아니라 조기련은 국외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1970년대, 조기련은 각종 세계 모임에 참여하여 한반도 통일 문제에 대해 논의했으며,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등의 활동을 하여 서구 지역의 기독교들과 교류하려고 힘썼다. 세계 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는 정보 부족이라는 이유로 북한 교회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지만, 1980년대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한 후 부터는 북한 교회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했다. 


북한 교회의 변화

1980년대 후반은 북한에게 가장 큰 변화의 시기였다. 동유럽의 동독, 헝가리, 폴란드 등의 여러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소련 마저 무너졌다. 동유럽엔 비사회주의적 정권이 들어서 남한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중국 또한 점차 남한과의 교류를 넓혀 갔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북한에게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해 소련 등에서 공급받던 석유 등의 지원이 끊기는 일은 매우 큰 위기였다.

북한 정부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교류를 넓히려는 다양한 시도를 했다. 서구 나라들과 교류하기 위해선 먼저 남한과의 관계 개선이 시급했다. 북한 정부는 남한과의 대화를 하며 민간인들과의 교류도 크게 넓혔다. 남한의 진보적인 성향을 띄었던 개신교인들은 교류하기 매우 적합한 상대였다. 하지만 교회 건물이 없는 것에 대한 남한 기독교인들의 의심과 조기련의 요구, 대외 선전 등의 이유가 맞물려 북한은 1988년 봉수교회를 건립했다. 북한은 이미 오랜 시간동안 가정예배 형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교회 건물에 대한 필요성이 없었고, 이를 반대하는 교인이 대부분이였다. 하지만 북한이 서구 나라들과 교류를 하고, 이들이 북한에 방문하는 일이 많아져 이들을 위한 예배 장소가 필요하기도 했다. 이러한 다양한 이유에서 평양에 봉수교회가 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칠골교회도 1992년 추가로 건립되었다. 

또 북한은 기독교에 대한 제한을 완화시켰다. 1992년 헌법을 개정하여 종교 선전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내용과 종교활동을 허용할 것이라는 내용을 추가시켰다. 또 당해 발행한 조선말대사전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이 완전히 사라졌다. 1981년 발행한 현대조선말사전의 내용과 대비되는 내용이였다. 선교사는 “기독교를 보급선전할 사명을 띠고 다른 나라에 파견되는 사람” 이라고 서술했고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언약을 담은 거룩한 글이라는 뜻으로 예수 출생 이전의 천지창조설과 인류의 번성역사, 예언자들을 통하여 주어진 하느님의 언약을 기록하였다는 책이다.” 라고 서술했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의 건립과 기독교의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더욱 전파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북한의 일반 교인이나 지하교회 성도들은 교회에 접근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는 북한이 기독교를 장려해 건립된 것이 아니라 그저 대외적인 선전을 이유로 건립된 것에 불과하고 북한 노동당에서 지정한 사람들만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또 신앙의 자유와 관련된 헌법은 사실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헌법이였다. 북한에는 헌법보다 더 높은 법인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확립의 10대 원칙” 이라는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이 원칙에는 교회를 “반동 통치 계급이 인민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는 사상을 선전하여 퍼트리는 거점"이라고 명시되어 있는데 이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내용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따라서 북한의 교회 건립과 헌법 개정을 북한이 신앙의 자유를 주었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지하교회의 현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하교회는 더욱 발전해 나갔다. 북한의 공식적인 가정교회들은 조기련의 감독 하에 사회주의를 따르는 교회들인 반면, 지하교회는 보다 더 진보적인 성향을 띄고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지닌 교회가 대부분이였기 때문에 북한 정부의 심한 압박과 제재를 받고 있다. 실제로 발각된 지하교회 성도는 수용소로 끌려가 강제 노동이나 고문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 지하교회는 1980년대 초, 중국이 개혁하며 점차 생겨나기 시작했다. 중국은 그 당시 북한, 한국, 일본 등 다양한 나라들과 교류를 하였다. 자연스레 중국과 북한을 왕래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는데, 이 중 선교사들도 있었다. 이들이 성경을 비밀리에 반입해 지하교회가 건립되었다. 지하교회는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경제 위기 시절에 중국과 북한을 오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탈북자 수가 많아지면서 점차 더 많이 생겨났다. 이 중국으로 넘어온 탈북인들이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을 듣게 되고 성경공부를 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지하교회를 구축하기도 했다. 지하교회를 이끄는 사람은 중국에서 온 선교사들이거나, 남북한이 분단되어 북한이 공산주의가 되기 이전에 신앙생활을 했던 노인들이 대부분이였다. 이들이 더 이상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없게 되자 교회 구성원 중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교회를 이어 나갔다.

지하교회에 대한 현실은 1990년대 남한과 북한의 교류로 남한 민간인이 방북하는 일 등을 통해 국내에 전해졌다. 현재까지도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은 남북 분단 이후부터 북한 정부의 심한 탄압으로 고통을 받는 와중에도 신앙심을 잃지 않고 있다. 하나님은 각기 다른 민족에게 다양한 구원 계획을 준비하고 계신다. 소련이 붕괴되며 신앙의 자유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고, 중국 또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현재 북한만이 유일한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국가이다. 2011년 김정은이 북한을 집권하고, 대한민국에도 보수적인 정부가 들어서 남북한 교회의 교류는 중단되었다. 하지만 2018년 3차에 걸친 남북정상회담으로 평화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통일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영원한 기도제목 중 하나였고, 남북한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남북한 교회에 대한 교류 또한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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