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기독교국가 설립
  2. 한국교회와 복지 (구호물자, 고아원, 미망인, 결핵환자 등)
  3. 1950년대 정책과 한국교회  
  4. 이승만 정부와 한국교회의 관계 



기독교 국가 설립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과 북한이 분리 독립국으로 등장한 해방-분단-독립-6.25 전쟁까지 한반도의 정치정세가 유동적인 해방정국 시기였다. 당시 개신교 지도자들은 새로 만들어질 정부가 기독교 정신에 기초해야 한다고 설교와 강연을 통해 주장을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연맹, 조선기독청년회전국연합회, 기독교민주동맹 등 해방정국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기독교계 정치단체들은 국가 재건과 기독교를 연결시키려했다. 한국 개신교인들은 서구의 사례를 통해 기독교가 민주주의의 기초라고 이해한 바와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이해한 우익이 미군정 아래에 있는 상황을 기독교 국가 건설의 호기로 여겼다. 새롭게 설립될 나라는 기독교적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이승만, 김구, 김규식 중 기독교적 정체성이 지속적이고도 분명했던 사람은 김규식과 이승만이었다. 한성감옥에서 개종한 이후 줄곧 기독교적 국가 건설에 관심을 가졌던 이승만은 1919년 4월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추대된 직후 미국 신문기자와 인터뷰하며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방침은 한국을 동양에서 처음으로 “예수교국”을 만드는 것이라고 밝힐 정도로 기독교적 정체성을 표현했다. 1948년 5월31일 대한민국 제헌국회 개회식에서 사회를 맡게 된 이승만은 감리교 목사 이윤영 의원에게 기도를 부탁하며 제헌국회 성립에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이는 한민족의 역사상 정부의 공식행사에서 기독교 의식이 행해진 첫 순간이었으며 당시 대한민국은 국교 없는 세속적 국가임과 동시에 국회의원 절대다수도 기독교인이 아닌 상황이었음에도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 당선 후 취임식에서 “하느님의 은혜"로 살았음과 “하느님과 동포 앞에서" 직무를 다하겠음을 고백했다. 


교회를 통로로 회복한 복지

6.25 전쟁으로 한국땅은 온통 폐허가 된 모습이었다.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한국땅에 세계 곳곳에서의 구호 사업이 시작되었다. 총 50개의 민간단체 중 기독교 관련 단체가 40여 개에 달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 영국, 캐나다, 호주, 독일, 스위스 등 다양한 국가에서 지원을 했지만 한국 기독교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미국 기독교 외원 단체는 CWS(Church World Service)였다. 미국교회협의회 NCC(The Nation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the USA : 미국 NCC)의 산하단체였고 세계교회협의회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또한 NCC의 주도 아래 있었기 때문에 이 두 단체의 지원과 협조로 구호활동을 전개했다. CWS는 1946년부터 기독교 월남민들을 대상으로 한국 구호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교회를 통해 구호비와 구호물품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한국교회는 분배하는 과정에서 효율적인 일처리를 위해 1951년 7월 ‘한국기독교봉사회(KCWS)’를 재조직했으며 아동복지사업, 결핵사업, 미망인 사업 등 구호사역의 영역을 세분화해 헌신했다. 뿐만 아니라 월드비전, 스완슨전도협회, 대한구세군, 조지드레이크 등 여러 단체와 개인이 한국 전역을 뒤덮은 전쟁의 절망과 고통의 신음에 응답했다. 과거, 밥 피어스(Bob Pierce)로부터 시작되어 ‘한국선명회’라는 이름으로 전쟁고아와 미망인들을 돌보았던 단체가 현재의 월드비전이며 스완슨전도협회도 고아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들을 구호했다. 딘 헤스(Dean Hess) 대령은 16대의 공군 수송기 16대로 1950년 12월20일 964명의 고아들을 제주도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고아나 미망인 뿐만 아니라 전쟁 중 수족이 절단된 이들에게 의수족을 만들어주고 병원과 직업훈련장을 외원 단체들이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수많은 결핵 환자들을 돌보며 농업을 경영할 수 있도록 기술을 알려주기도 했다. 


1950년대 이승만 정부의 기독교 정책과 한국교회

이승만은 미군정청의 친기독교 정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크리스마스 공휴일 제도를 유지한 것과 형목제도를 계속 유지하며 확장해 전국 18개 형무소 교무과장에 목사를 임명하고 정식 공무원으로 삼았다. 이는 4.19혁명 직후 정책이 폐지되기 전까지 형목직과 교화목사는 개신교가 독점했다. 국기에 절하는 의식인 국기배례를 주목례로 바꾼 것은 국가제도에 깃든 이승만의 기독교에 대한 각별한 배려 중 하나로 이야기할 수 있다. 보수적인 장로교 내에서 국기배례를 우상숭배로 여기는 교육을 받은 초등학생들이 국기배례를 거부해 퇴학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1949년 5월 한국기독교연합회가 주목례로 바꾸자고 진정서를 이승만에게 제출했다. 이승만은 이를 받아들여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는 주목례로 국가제도를 바꿨다. 군종제도를 실시한 것도 기독교에 영향을 미쳤다. 군종제도는 미국 제도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는데 이를 통해 수백 명의 군종 신부와 목사를 더불어 보조군목들이 각 기관과 병원에 배치되어 전도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는 1950년 9월, 미국 육군 제8군 군종부 문관이었던 가톡릭 선교사 캐럴(George Carroll)과 감리교 선교사 윌리엄 쇼, 군종제도 추진위원회 대표 한경직과 류형기의 요청으로 설립되었다. 하지만 군종활동에 지원할 국가예산이 없어 각 교단이 경비를 부담하고 문관으로 임명하는 조건으로 군종제도 설립을 허락했다. 공식적인 활동의 시작은 1951년 2월이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천주교 소속의 39명의 군종장교들이 활동을 시작했고 1952년 초에는 약 80명, 1955년 8월에는 352명으로 그 수가 증가했다. 무보수의 촉탁직 문관이었던 군목은 1952년 6월부터 유급 문관, 그리고 1954년 말부터 는 현역 장교로 지위와 대우가 격상되었다. 하지만 군종제도가 기독교에만 이로운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군종제도를 허락한 이승만이 중요한 이유로 둔 것 중 하나가 이념 전쟁에서 군종이 사상계몽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군종제도는 당시 군인들의 반공의식을 강화할 수 있었다. 개신교계 라디오방송인 기독교방송과 극동방송 설립을 허가해 최초의 민간방송을 개신교에 허락했고, 국영인 서울중앙방송국이 기독교 선교프로그램을 편성하도록 도왔다. 당시 모든 방송은 공보처가 직접 운영하는 국여체제인 상황이었다. 


이승만 정부와 한국교회 관계

한국교회는 이승만과 친미반공주의와 기독교를 매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그의 모든 정책을 무조건 적으로 지지했다. 이승만에게 개신교는 해방정국부터 정치적 동지였다. 이승만의 국내 지지기반을 확장하는 데 한국교회가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에도 결말은 4・19혁명과 정권의 종말로 이끌었다.

개신교와 이승만 정부의 긴밀함이 보이는 첫번째 사건으로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이야기할 수 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1945년 10월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좌우익을 망라한 통일전선 조직이었다. 이 시기 친 이승만 단체로 변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조직을 남부대회 소속 교회와 지도자들이 전국적으로 확장시켰으며 11월 말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이승만 지지가 시작되었다. 이 조직은 기독교신민회, 그리스도교연맹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 확산과 이승만 세력을 모으는 것에 큰 역할을 하였다. 둘째로는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통일을 당연시했던 해방정국의 분위기 속 개신교계 많은 이들이 이승만을 지지했다.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했고 이는 많은 개신교인들의 주도적인 참여가 있었다. 부장 12명 가운데 4명이 개신교인이었으며, 전국적으로 지방조직을 만들 때도 개신교인이 중요역할로 자리잡았음에서 개신교인의 참여가 돋보였다. 이후 김구가 남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문제 등으로 자리를 떠나자 개신교인을 중심으로 국민회는 제헌국회에서 55석을 확보함으로써 이승만 단독 선거 추진기구 역할을 했고 이승만의 대통령 선출에 기여했다. 그렇게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미군정 정책을 수용함으로서 민족반역자들을 처벌하지 않고 활용했는데, 이는 한국교회에도 영향을 미쳐 개신교계가 일제잔재청산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교권을 유지하게 만든 결과를 나았다. 그렇게 부일협력자들이 지지자가 되었으나 국회는 입장이 달랐다.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해 일본의 침략주의와 그 시책 수행에 협력한 종교인도 처벌 대상으로 명기를 해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이미 기득권 세력을 쥐고 있었던 부일협력자들과 이승만이 힘을 합쳐 반민특위는 그해 10월 해체되었고 심문, 체포되었던 이들은 모두 기소유예로 풀려나 이승만을 지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제도적 정치적 혜택으로 인해 이승만과 한국교회의 동맹관계는 더욱 끈끈해졌고 이 관계를 잘 볼 수 있는 사건은 전쟁 중 치러진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였던 1952년 8월의 정 부통령 선거이다. 간접선거로 재선되기 어려웠던 국회의 방식을 계엄령으로 강제로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한국기독교연합회도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해 선거를 앞둔 7월 본격적인 이승만 지지에 나섰다. 당시 기독교계는 민족의 기독교화에 기여할 인물로 이승만에 대한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1952년 정부통령 선거의 관심거리는 부통령 선거였다. 이승만의 당선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당시 유력했던 후보 이범석이 아닌 부일협력 혐의 없이 활동 할 수 있었던 장로교 목사인 함태영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 회장을 함태영에게 맡기고 해방 직후부터 정치적 동반자로 함태영과 함께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후보들과는 달리 지지가 빈약했음에도 이승만 정부의 이범석 선거운동방해로 함태영의 당선을 위해 힘썼다. 

제 2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승만은 취임선서 직전순서에 장로교 목사 배은희 의원을 불러 기도를 요청하며 제헌국회 개회식과는 달리 공식적 절차에 의해 진행했다. 이는 이승만의 기독교, 그와 한국 교회, 제 1공화국 시기 교회와 정치의 관계 등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한국교회는 한국기독교연합회를 중심으로 이승만을 지지하며 휴전반대 궐기 대회와 기도회를 개최하는 등 휴전반대에 적극적을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1956년 5월 정부통령 선거를 대하는 개신교계 태도는 1952년 대놓고 이승만과 함태경을 지지하던 자세와는 달리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다. 전쟁 중, 후로 이승만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일을 삼갔다. 그 이유로는 두가지 사건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국회정치파동이고, 둘째는 사사오입개헌이다. 이는 지지기반이 약해진 이승만은 비상계엄을 선포한 상태였고, 반민주적 정치 폭거를 일으켜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등 폭력 조직을 동원한 일이었다. 그리고 3선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내세웠는데, 이는 초대 대통령에 한에서 중임 제한을 없애는 것이었다. 개헌안 투표에서 재적의원 203명 중 2/3의 찬성, 즉 135.333명의 표를 얻어야 했지만 135표가 나와 부결되었다. 하지만 0.333...명은 버릴 수 있는 수이므로 203명의 2/3은 135명이라며 개헌안이 통과된 개헌이 선언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한국교회의 지지기반은 소극적으로 변했으며 1956년 정부통령선거일 한 달 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은 단독후보가 되었고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자유당이 관권과 경찰권 뿐만 아니라 정치 깡패까지 동원해 부정선거를 했다. 이는 이승만정권의 종말과 4.19혁명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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