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새로운 시대 도래와 개신교의 복구
  2. 한국 교회들의 정치 참여
  3. 기독교와 전쟁의 참혹함
  4. 분열과 분리, 세계 이목 중심지





새로운 시대 도래와 개신교의 복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 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광야”,  이육사   많은 조선인들이 해방의 소식 만을 바라며 일본의 패망을 기다리던 어느날, 거짓말처럼 일본이 연합국에게 항복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천황 히로히토가 대동아전쟁종결의 조서를 발표하였고, 마치 히로히토가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종전이라는 은혜를 베푼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거리에는 “조선 독립만세”, “축 해방”, “우리 정권 수립” 의 현수막들이 수없이 걸렸고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온 땅을 덮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로 조선의 개신교들도 그에 따른 변화를 맞이해야했다. 조선총독부의 압박으로 1942년에 조선예수장로회는 스스로 해산하였다. 뜻밖의 해방으로인해 한국교회들은 1943년 5월에 창설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조선기독교단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이후 1945년 9월에 서울에서 남부대회를 개최했다. 이는 당시 38도선으로 분단되어 남북을 오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한 한국교회가 남쪽 교회만의 모임을 만들었기에 남부대회라 일컸는데, 조선기독교단에 소속되어 있는 여러 교단들의 불참석으로 인해 별다른 결정없이 해산하였다. 그후 1945년 11월 그들은 다시 남부대회를 소집하여 회장단 선출, 선교사 파견 요청, 기독공보 발행을 결의하는 등 각종 사안을 처리하였다. 그렇다면  북쪽은 어땠을까? 1946년 10월 북한지역 감리교 조직인 서부연회가 재조직되었는데, 서부연회는 남북분단 상황으로 조선의 모든 교회가 통합  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성화신학교를 설립하여 북쪽 나름의 교역자 양성기관을 두었다. 그 후 1945년 12월 평양에서 북한지역 장로교를 통합한 조직으로 5도연합노회가 결성되었다. 5도연합노회는 남북한 전체를 아우르는 장로교단을 만들 수 없는 분단 상황에서 북한지역 장로교의 임시 총회 역할을 했다. 5도연합노회는 평양신학교를 직영 신학교로 삼았다. 



한국 교회들의 정치 참여

해방 이후에 우리 민족이 해결해야할 첫번째 과제였던 친일파 색출과 처벌은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일이었다. 이에 한국의 개신교회 또한 과거를 청산해야했는데 이에 교회는 일제감정기에 저지른 신사참배와 반민족적 행위를 회개하고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여 국가 재건에 기여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회와 조선기독교단의 신사참배 문제로 인해 교단 재건에 이의를 제기하는 신사참배 반대파들이 생겨났는데 그들은 해방 이후, 신사참배에 저항하던 출옥성도들이었다. 그들은 신사참배를 행했던 교역자들에게 휴직 및 통회자복을 요구하였고, 회개, 정화를 전제로 한 교회재건의 5대 원칙을 발표했으나 숫적인 열세에 교회재건 작업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기존의 친일 교권은 자리에서 물러나려 하지 않아 그들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지 사령관의 통치의 영향도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 남한을 통치했던 하지 사령관은 한국인보다 일본인들의 능력을 더 높게 평가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어떻게 보면 당대 강국인 나라들의 연합군의 맞서 전쟁을 벌인 이력이 있고, 어느 정도 높은 수준의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의 입장에서는 일제시대때 한반도의 행정, 치안 등을 처리하던 인재들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한국을 관리하는데 더 늉률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해방 이후에도 교회, 정치 등 국가의 모든 영역은 친일파의 손에 다시 넘어갔고, 권위적인 친미 반공 정권이 세워졌다. 그와중에도 미군정이 높게 평가한 한국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기독교인들이었다. 물론 미군이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사고를 지닌 것도 있었으나 당시 입국한 언더우드와 피셔 등 선교사들이 하지 사령관과 가까워 대체적으로 친미적이고 영어를 구사할 수 있고 유학 경험까지 갖춘 기독교인들을 추천했다. 이에 기독교인들 또한 친미 반공 주의적 성향을 띌 수 밖에 없었고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은 확실하게 정치참여에 들어갔다. 남한의 대표적 지도자로 불리던 김구, 김규식, 이승만이 모두 개신교인이었다. 

해방 이후에 우리 민족이 해결해야할 두 번째 과제는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하는 일이었다. 38선을 중심으로 미군과 소련군이 남북을 각각 점령하여 군정을 펼치는 상황에서 미소공동회를 구성하여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회담을 진행하였으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에 미국은 1947년 9월 한국독립 문제를 제2차 유엔 정기총회에 안건으로 제출하였다. 유엔에서 미국의 주도로 한국 문제가 본격적으로 토의되자, 소련은 미국의 노력에 제동을 걸었다. 소련은 미국의 논의 제안에 이의를 제기하고 9월 26일 미소공동회 소련대표를 통하여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외국군대가 1948년 초에 동시에 철수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유엔 한국위원단은 1948년 1월에 활동을 개시하였으나 소련의 반대로 북한에서의 활동은 좌절되어  1948년 5월 10일 북한을 제외한 남한 만의 총선거를 진행한다. 이어서 행정부까지 조직하여 대한민국은 유엔 총회의 승인을 얻어 합법정부가 되었다. 한편 북한은 공산당이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단독정권이나 다름없는 공산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이렇게 8월과 9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출범하면서 전쟁의 위험은 현실화되었다. 이승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반도 전체를 민주화시키고 하나된 국가를 세우기 위해 북진통일을 주장했고, 북쪽에서는 박헌영과 김일성이 한반도를 무력으로 공산화하려고 스탈린을 찾아가 전쟁 승인과 지원을 요청했다. 




기독교와 전쟁의 참혹함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전면전이 벌어졌다. 사흘 만인 6월 28일에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남한군은 낙독강 최후의 전선까지 밀리게 되었다. 유엔은 남한을 군사적으로 원조할 것을 결정하였고, 미국을 포함한 16개국의 군대가 내한하여 합동작전을 개시하였다.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였다. 9월 30일에는 38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계속하여 압록강까지 도달하였다. 한반도의 통일까지 얼마 안남은 시점에서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한강 이남까지 후퇴하다가 유엔군의 반격으로 공산군은 다시 38선 이북으로 밀려났으나 계속되는 땅따먹기에 지친 양국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맺어 6.25사태를 종식시켰다. 

남한 교회는 전쟁수행을 돕기 위해 선무공작, 구호활동 등을 멈추지 않았다. 한국 전쟁 동안 남한교회는 반공주의적 태도를 드러내며 세계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해외교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당연히 적극적인 미국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에 질세라 북한교회도 북한의 전쟁 승리를 기원하며 전쟁수행에 적극 협조했고, 1950년 인민군의 서울 점령 기념으로 감사예배까지 드렸다고 한다. 전쟁승리를 위한 무기대금 헌납운동도 실시하였다. 

3년 이상 지속된 지겨운 한국 전쟁의 피해는 막대했다. 약 120만 명이 전사했고, 민간인 희생자도 북한 주민 220만 명 이상을 포함하여 250만 명을 넘었다. 전쟁으로 북한은 인구의 약 20%를 잃었다. 남북한 교회와 교인들의 피해도 막심했다. 개전 초기  남한지역에 남아있던 김규식 등을 비롯한 기독교계 정치인, 남궁혁, 양주삼, 송창근, 김유순 등 많은 개신교 지도자 그리고 선교사들도 다수가 납북되었다. 충청도, 전라도 일부 지역에서는 좌익세력이 기독교인들을 집단학살하기도 하였다. 충청도, 전라도 일부 지역에서는 좌익세력이 기독교단을 집단학살하기도 하였고, 황해도 신천에서는  개신교인들을 비롯한 반공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였다.  분열과 분리, 세계 이목 중심지

전시 상황에서 가장 긴박한 구호 대상자는 어린이다. 6.25전쟁 중 고아가 되거나 부모와 헤어진 어린이가 최대 10만 명에 이르렀다고... 기독교아동복지회, 스완슨복음전도회, 월드비전같은 구호단체들은 급식을 제공하며 고아원을 설립하고 해외 입양을 추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한국전쟁 동안 활동한 구호단체는 모두 캐나다, 호주, 영국, 서독일 등 서구에서 왔다. 그 가운데 미국교회 소속 단체가 가장 많았다. 전쟁을 주도적으로 수행하고 있으며 한국교회와 가장 인연이 깊은 나라가 미국이었으며 미국 교회의 재정이 가장 넉넉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미국 교회와 단체들의 막대한 원조를 받게 되어 개신교인들은 미국을 은인 국가로 인식했다. 그래서 분당에 대한 미국의 책임은 점차 잊혀졌고, 미국에 대한 한국교회들의 인식은 미화되었다. 

세계 교회와 기독교 구호기관들도 이데올로기에 따라 나뉘어 남한 혹은 북한에서만 활동했다. 국호기관들은 모두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였지만 냉전기의 국제정치 구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서 그랬다고...  기독교세계봉사회에 막대한 구호품을 지급해주는 큰 손은 미국이었기에 미국 정부가 원하지 않는 곳에서는 활동할 수 없었기에 이데올로기에 따른 구호사업의 분열은 한국전쟁이 얼마나 냉전적 전쟁이었는지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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