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일본 침략전쟁의 서막
  2. 대일본 제국의 신민
  3. 무너지는 한국 교회
  4. 고개숙인 한국 교회
  5. 선교 학교의 충돌



일본 침략전쟁의 서막 

1929년 미국에서 부터 시작된  세계대공황은 일본을 휘청이게 만들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경제가 급속도로 좋아지면서 새로운 경제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했다. 1928년 미국 허버트 후버(Herbert Clark Hoover) 대통령도 “빈곤종식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라고 말하며 풍요의 경제를 선언했다. 하지만 1929년 10월 29일 뉴욕의 증권시장이 하루 아침에 30% 이상 폭락해 버렸다. 그리고 증권시장은 계속해서 하락해 1932년 7월 9일에는 89%가 주저 앉게 되었다. 이로인해 많은 실업자가 생겨나고 세계대공황이 전 세계로 전이 되어 길고 긴 경제 불황을 낳게 되었다.

세계대공황이 일어나기 전 일본은 이미 금융위기를 겪고 있었다. 일본은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의 피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거액의 대출을 생성하고 있었다. 일본 은행의 재무구조는 그들의 재무제표로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취약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1927년 봄이 되자 몇몇 은행들이 곤경에 처해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게다가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에서 활동하는 일본 기업들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대만은행의 고객 중의 하나인 스즈키 상점이 1927년 파산을 선언했다. 대만은행의 예금주들은 곧바로 예금을 인출해 은행의 문을 닫게 만들었다. 이는 곧 연쇄작용을 일으켜 일본의 여러 은행의 예금주가 대규모로 예금을 인출하는 이른바 뱅크 런(bank run)이 일어나며 1927년 4-5월 3주 사이에 수십 개의 은행이 지급불능을 선언했다. 이러한 시기때 세계 대공황이 겹치면서 일본의 경제는 급속도로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1929년 부터 1931년 사이 일본의 경제규모는 8%나 감소했다. 일본 정부는 강력한 경기부양책을 사용하여 1934년경 공황을 벗어날 정도로 경제위기를 조기에 극복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경기부양책으로 인플레이션 위험이 커지자 정부 지출을 줄이기 시작했다. 정부의 주요 대상은 군대였다. 정부가 군사비를 줄이자 군부와 국수주의자들은 크게 반발했다. 또한, 문민정부는 무력증강을 제한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무력으로 영토를 확장하길 바랬기 때문에 문민정부의 명령에 반하여 독단적으로 만주지역을 침략했다. 또한 젊은 장교들은 이 기세를 몰아 자신들이 직접 정권을 잡기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결과로 군국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다. 군국주의자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일본 해군력을 제한하는 런던해군조약을 깨뜨리기 위해 수상을 암살했다. 암살범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재판과정에서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했고 이를 본 일본 국민들은 암살범들을 동정하기 시작했다. 결국 재판부는 선처를 요하는 일본 국민들의 요구에 암살범들에게 극히 가벼운 처벌을 내릴수 밖에 없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법치주의와 문민통치는 군국주의자들에게 치명타를 입게 되었고 이로서 일본은 군국주의의 시대가 펼쳐졌다. 1941년 12월 미국 하와이를 시작으로 군국주의자들의 침략전쟁이 막을 열었다는 것을 알렸다. 미국 하와이를 다음으로 진주만을 습격했고 그렇게 전쟁의 범위를 차츰차츰 늘려 나가 태평양 일대까지 넓혀 나갔다. 


   대일본 제국의 신민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물자가 필요했다. 총, 칼, 식량등도 필요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전쟁수행에 참여하는 사람들이었다. 일본은 수 많은 전쟁으로 인해 전쟁에 참여할 인원수가 부족하게 되었고 일본은 식민지의 사람들을 동원시켜야 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나라를 빼앗아간 나라를 위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사람은 없었다. 이에 일본은 일본인과 한국인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사상을 한국인들에게 주입시켜 한국인이 일본의 전쟁을 자기 전쟁으로 여기게 만들었고 전쟁에 적극 동참하게 만들었다. 일본은 조선인의 민족 정체성을 사라지게 하여 일본인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일제는 조선과 합병 후 점차 조선에서 일본어 교육을 실시해 나갔으며, 모든 민족적인 문화활동을 금지하고 자신들의 언어 교육을 강요함으로써 민족성을 말살하려고했다. 1937년 일본은 또한 황국신민화정책을 전방위적으로 실시하여 한국인들을 완전히 일본화로 만들려고 했다. 총독부는 황국신민서사를 제정하여 모든 한국인이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라고 표명하였고 일본은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천황숭배 의식을 하도록 하였다. 이 의식은 학교를 비롯한 관공서, 은행, 공장, 상점 등 모든 직장의 조회, 기타 회합 등에서 제창되었다. 황국신민화정책의 궁극적 목적은 한국인을 전쟁수행에 동원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 한국인은 병역의무가 없기 때문에 강제징집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선일체 사상을 주입시켜 지원병을 모집했다. 하지만 더 많은 인원이 필요했던 일본은 1944년 부터 징병제를 실시하여 18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징집했다. 


무너지는 한국 교회

 종교를 통제하려는 정부가 제국의회의 종교법안을 통과시킬려고 했지만 결렬되어 다이쇼시대에 한동안 잊혔던 종교법안이 쇼와시대에 들어 다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종교단체법은 일본이 얼마나 전체주의적 성향을 띄우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있다. 종교법안은 종교단체를 통제할 목적으로 제시 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종교법안을 제국의회에서 통과시킬려고 하였다. 하지만 일본 종교계에서 강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종교법안이 통과되는 순간부터 정부의 핍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본 종교계는 이 안건을 통과시키지 않기 위해 강한 반대운동을 하였고 제국의회에 반대의견서를 제출하였다. 그렇게 종교법안은 제국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이로인해 종교단체법안은 또 다시 제국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러나1939년 제국의회가 종교단체법을 통과시켰다. 1930년 일본이 정복전쟁에 나서면서 일본은 점점 더 군국주의적 파시즘 국가가 되어갔다.. 이 말은 즉 그 만큼 군사력이 강해졌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1939년 종교단체법이 제국의회에서 통과되었고 이러한 결과는 종교활동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940년 4월 시행된 종교단체법의 근본 목적은 종교 활동을 엄격히 감독하며 천황은 살아있는 신이고, 일본은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족국가라는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 “국체”를 고취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종교계를 이용하여 국가를 청황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결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종교단체는 철저히 통제되기 시작했다. 종교단체법으로 그들의 활동 영역이 침범 당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또한, 일본 정부는 종교인들을 전쟁수행에 동원시키기 위해 위협을 가했다. 그렇게 종교인들도 전쟁수행에 동원되었다. 기독교계는 메이지시대부터 정부의 엄청난 압박 속에서 활동을 전개했다. 기독교계는 국체에 맞는 행동들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재일조선기독교회가 모든 예배와 집회때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정부로부터 교회 공인을 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생존 자체가 어려워 졌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기독교계는 일본 기독교회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개신교는 1941년 6월 국체를 함양하겠다고 표명했다. 그들은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 

총독부는 1938년 2월 조선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실시하여 국체에 적합한 기독교를 만들려고 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교단과 교인에게는 강한 위협을 가했다. 1940년에 마련된 기독교에 대한 지도방침의 목적은 한국 기독교를 선교사 및 서구교회와 단절시키고 각종 기독료 출판물을 단속하는등 국체를 함양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일본적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라는 애국 단체를 만들어 교단과 교인들을 가입하게 했다. 그리고 각종 애국의식을 행해게 하였다.

여기서 일본적 기독교란 서구와 관계를 끊고 침략전쟁 수행에 순응, 협조하는 기독교를 말한다. 일본적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 일본은 정치적, 물리적, 강제력을 총동원하였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교회는 핍박을 받을 때 소수의 기독교인들만 빼고 핍박하는 자에게 순응한다. 전시체제시기에 총독부 정책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극심한 고통이나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신앙과 지조를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38년 많은 기독교협회가 세계연합회나 세계연맹에서 탈퇴하고 일본 조직 산하에 들어가면서 한국교회가 전쟁수행에 동원되었다. 

일본은 개신교의 교단들을 통합교단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에 가장 협조적인 곳은 감리교였다. 1942년 감리교는 통합교단의 교리를 신약성서를 기초로 만들었고 유태 사상이 들어 있는 구약성서는 한국 신자들에게 민족부활의 소망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여 구약성서를 재검토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하지만 장로교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감리교는 장로교와의 합의점을 찾기 위해  조선기독교혁신교단을 만들었지만 성서의 일부를 인정하지 않는 문제로 인해 조선기독교혁신교단은 결렬되었다. 1943년 8월 감리교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일본기독교단 산하 조직으로 들어갔다. 새롭게 만들어진  감리교단은 설교할때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요한계시록을 사용하지 않았다.    

장로교는 교파합동이 결렬된 직후인 1943년 5월 총회를 해체하고 일본기독교조선 장로교단을 결성하였지만 약 1년 동안 주도권 다툼으로 인해 분열되었다. 장로교는 만주지역의 노회들을 총회에서 분리해주어 1941년 만주의 한국인교회들이 교파를 연합하여 만주기독교 총회를 설립할 수 있게 도왔다. 1940년 11월 조선구세군은 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이름을 조선구세단으로 바꾸고 국제구세군과의 관계를 끊었다. 이로힌해 선교사관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조선구세단은 일본구세단에 의해 운영되었다.

1945년 6월 정무총감이 개신교단 지도자들을 총독부로 불러 모든 교단을 통합하라고 촉구했다. 당일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한 달 후 장로교, 감리교, 구세단, 그리고 몇몇 남아 있던 군소교단이 통합하여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결성하였다. 교단 해산 및 통합과 아울러 신학교의 통폐합도 실시되었다. 총독부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학교를 운영할 수 없게 하였다.감리교신학교는 창씨개명을 하지말라는 등의 항일적 내용이 담긴 전단이 학교 교정에서 발견되면서 무기휴교에 들어갔다. 1941년 신앙을 통해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신앙보국”을 바탕으로 교수진을 다시 짜고 개교했지만 학교운영이 순탄치 않았다.

한국교회 지도부는 총독부 정책에 적극적의로 협조하였다. 특히 장로교의 경우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고 일본적 기독교로서 당국 정책에 협력할 것을   결의했다. 국민정신총동원장로회연맹은 1940년 총회에 보고될 정도로 열심히 애국활동을 위해 힘썼다. 군인들에게 위로금을 주거나 놋그릇을 헌납하고 교인들에게 1인당 1엔씩 헌금을 받아 총 15만엔 정도를 당국에 전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또한, 장로교는 일본 전쟁물자 조달을 위해 힘썼다. 감리교는 1941년 국민총력조선기독교감리회연맹이 결성되면서 부일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4년 3월 애국기를 헌납하였고 1944년 9월 일본 정신과 문화를 교육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였다. 또한 일장기를 머리에 두른채 남산 조선신궁까지 뛰어가 참배를 하였다.

모든 교단은 부일활동을 통해 교단을 유지하려 애썼다. 부일활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과거 3.1운동 등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기독교 기관의 지도자로 활동한다는 것은 곧 적극적으로  부일협력한다는 의미였고 한국교회의 총독부 압력과 탄압이 거세지자 존경받을 만한 다수의 교역자는 은둔하게 되면서 한국교회는 전체적으로 지도자 공백상태가 되었다. 지도자 공백상태는 지속되었고 총독부의 탄압이 더욱 거세지자 많은 교인이 집단으로 신앙을 버리고 부일협력을 통해 생존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한국교회는 1년 만에 10만 명 정도의 교인들이 감소하였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여기서 무너지지 않았다. 조선어학회를 조직하고 한글 연구와 보급을 위해 힘썼다. 그리고 1942년 남궁억은 강원도 홍천에 학교를 설립하여 한국 역사와 지리를 기르쳤고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무궁화 시와 노래를 지어 보급하는 무궁화 심기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집단적으로는 안창호의 훙사단계조직인 (수양)동우회와 이승만의 동지회계열인 훙업구락부가 국원회복 활동을 1920년대부터 했다. 이 두 단체는 기독교 조직은 아니었지만 개신교인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회원의 다수도 개신교인이었다.


고개숙인 한국 교회

신사참배는 신도의 가미를 모신 신사에서 참배하는 행위를 말한다. 메이지 정부는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을 통합하여 중앙집권적 국가로 만드는 방안 가운데 하나로 국가신도를 만들었다. 국가신도의 목적은 천황을 아마테라스의 후손, 즉 살아 있는 신으로 여겨 그에 대한 충성심을 종교적 차원으로 끌어올려 절대화 하고, 천황을 정점으로 국가를 일사불란한 체제로 만드는 데 있었다.국가신도는 일본이 식민지의 새로운 주인임을 알려주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은 신사참배를 통해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민주적인 다이쇼 시대에는 일본 내에서 국가 신도가 유행하지 않았고 국가신도를 통해 한국인의 충성심을 고취한다는 발상을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기면서 일본인도 신사에 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1931년 신사참배는 국가적 위기인 만주침략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1935년 부터 천황을 초헌법적 살아있는 신으로 만들기 위한 “국체명징"운동이 일본에 전개되었다. 이전에는 신사에 가더라도 절을 하지 않게 허용하는 등 선교사들의 요구를 대체로 들어주었지만 국체명징운동이 전개되면서 신사참배를 행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천황 모독죄에 해당하는 가혹한 처벌이 내려졌다.신사참배는 종교적 의식이 포함되어있었지만 일본정부는 종교행위가 아닌 애국행위라고 강변했다. 종교적 요소 때문에 불교계나 기독교계는 신사참배에 부정적이었다.


선교 학교의 충돌

신사참배가 특히 선교학교를 둘러싸고 크게불거졌다. 그 이유는 총독부 입장에서 기성세대를 일본화시키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에 학생은 황민화정책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었다. 그리고 선교학교가 교육에서 담당하는 역할이 일본과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컸고, 그영향력도 막대했기에 당국은 선교학교가 신사참배에 응하지 않을 경우 교장 자격 박탈과 학교폐쇄를 공언했다.          

조선총독부가 본격적으로 기독교계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이 1931년 만주침략을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1934년 선교 50주년을 맞을 때까지만 해도 북장로교 한국선교부는 총독부와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였다. 따라서 당국은 자방관들의 재량 아래 신사참배에 기독교계 학교가 참여하지 않게 해준다든지 아니면 참여하더라도 종교적 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하지 않도록 배려해 주었다.  이에 대해 선교사들은 각종 애국행사에 참석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그러나 침략전쟁의 격화, 일본 내 군부의 득세, 그리고 한국강점 25주년 등이 겹치면서 신사참배에 대한 총독부의 자세는 점점 더 강경해졌다. 이에 맞서 선교사들 가운데 조지 매큔(George Shannon McCune)등이 교리와 양심에 반한다는 이유로 참배 명령에 불복했고, 신사참배를 둘러싼 당국과 선교사 및 선교사 집단 내부의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1936년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신사참배가 강요될 경우 선교학교의 문을 닫기로 결정했고, 남장로교 선교부는 운영하던 10개의 중등학교를 1937년 부터 폐교했다. 1936년 감리교는 남장로교와 반대로 신사참배는 국가의례라는 총독부 입장을 받아들였다.장로교 가운데 가장 진보적이었던 캐나다 선교사들은 신사참배가 강요되기 전에는 신사에서 요구하는 행동수칙이나 행사 참석을 거부했지만 1935년 본격적으로 신사참배가 강요되면서 신사 비종교론을 수용하고 참배를 결정하였다. 또한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은 1936년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며 신사에 참석하더라도 신사에 가미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등 당국과 마찰을 빚지 않으며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애썼지만 총독부가 신사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행위를 엄금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1939년 1월 학교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신사참배 문제는 진보적인 성향을 띌 수록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고, 보수적인 성향을 띌 수록 그것을 배교행위로 여겼다. 한국선교부는 신사참배를 하더라도 선교학교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과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교육산업을 접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나뉘었다. 

1936년 북장로교 선교부는 교육사업 철수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신사참배가 다른 종교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차원이라고 말하는 연희전문 교장 언더우는 이 결정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때 그동안 쌓여 있었던 보수적 교권파와 진보적 선교사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아 폭발하였다. 따라서 북장로교 선교부가 교육사업 철수를 결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평양지역 학교 이외의 선교학교 문을 닫는 문제는 쉽게해결되지 않았다.일제시대때 선교학교는 기독교적, 민족적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얼마되지 않는 곳이었고 중등학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신사참배 문제 때문에 학교를 폐쇄하려고 하자 학생, 학부모, 졸업생 그리고 지역사회는 강하게 반발하였고, 꼭 폐쇄해야 한다면 한국인에게 학교를 인계하여 교육을 계속할 수 있도록 요구했지만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신사참배하는 일을 용납할 없었다는 입장이었던 장로교는 요구에 거절하였다.

광주에서는 선교학교 폐쇄를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들은 신사참배보다 교육이 더 절실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쿤스나 헤럴드 같은 소수파는 선교부 실행위원회의 반재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에게 학교를 인계해주었다. 그들은 선교학교 폐쇄가 기독교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는 행위일뿐 아니라 학생들을 공립학교로 가게하여 결국 아무런 제약도 없이 신사참배를 행하게 하는 짓이라고 다수파 지도부를 맹비난했다. 신사참배가 학교를 넘어 일반 교인들에게까지 강요되었고 그로인해 조선장로회 총회가 1938년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선교사 가운데 신사참배를 적극 찬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국가에 의해 신사참배가 애국행위라며 강요되는 폭력적 상황에서 어느 정도 수준에서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냐가 문제였다.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임박하자 미국정부는 한국에 나가있는 선교사들에게 철수할 것을 강권했다. 1940년 11월 신사참배에 반대하던 선교사들은 거의 예외없이 한국을 떠났고 신사참배에 응한 진보적 선교사들은 한국에 남았다. 남은 선교사들은 전쟁이 나더라도 정당한 대우를 받으리라 믿었지만 전쟁이 시작되고 선교사들은 경찰서에 끌려가 간첩혐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심한 고문을 받았다.  1942년 6월 초 태평양전쟁 때까지 남아 있다 구금당한 37명의 서양 선교사들은 각자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그렇게 한국에 있던 모든 선교사들은 떠났고 한국 교인들은 예배 때마다 황국신민서사를 읽으며 천황궁을 향해 절하면서 해방의 날을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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