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신교 선교의 첫 시작과 함께한 선교사들
  2. 한글성서의 등장과 조선의 첫 개종자들
  3. 조선 선교는 언제부터 시작 되었는가?


개신교 선교의 첫 시작과 함께한 선교사들

개신교 선교의 첫 시작과 함께한 선교사들  개신교가 조선에 들어오게 된 것은 1910년이었으며 식민지 개척에 승차면서 들어오게 되었다.  19세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동북아시아의 마카오로 몰리기 시작했다. 마카오는 교두보와 같은 역할을 했다. 중국은 영국과 아편전쟁을 벌였다. 영국은 중국에게 아편을 팔아 무역을 했었는데 아편을 받아들였던 중국은 결국 나라가 휘청이는 일이 발생했다. 국민들의 건강뿐만 아니라 나라가 위기에 빠진 중국은 나라의 문을 닫고 무역을 금지시켰다. 이를 알게된 영국은 반발하여 중국과 전쟁을 벌였고 아편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영국이 중국과 불평등 조약인 난징조약을 맺었다. 이로 인해 마카오에서 5개의 항구를 열어야 했다. 항구가 열리자 마카오에는 서양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귀츨라프(Karl F. A. G)는 선교를 하기 위해 마카오로 진출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조선에서 선교를 하기 전에 중국땅에서도 선교를 했었던 귀츨라프는 선교를 하기에 다른 이들보다 큰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귀츨라프의 장점은 언어능력이 뛰어난 것이었다. 

마카오에서의 생활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귀츨라프에게 로드 앰허스트(Lord Amherst)라는 배가 제안을 걸어왔다. 귀플라프는 언어능력이 뛰어난 장점을 활용한 통역이 가능했으며 의사의 신분도 가지고 있었다. 여러가지 방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던 귀츨라프는 로드 앰허스트호의 제안에 동참했다. 귀츨라프가 로드 앰허스트호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로드 앰허스트호를 통하여 자신에게 부여되는 기회들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로드 엠허스트호와 함께 한다면, 여러가지 방면에서 일할 수 있었으며, 그가 원하던 선교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귀츨라프와 로드 앰허스트호가 함께 중국 해안선을 타고 교역을 요청하고 다녔던 그때에 조선측에서 로드 엠허스트호에게 불법에 해당하는 항해 활동을 중단하라는 경고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로드 앰허스트호는 조선의 말을 듣지 않고 충남에 정박한 후에 조선 국왕에게 통상요청을 보내고 답이 오기만읊 기다렸다. 그러나 통상요청은 거절되었고, 로드 앰허스트호는 섬을 떠나버렸다. 귀츨라프가 로드 앰허스트호와 함께 일을 했었던 목적은 선교를 위해서였다. 그는 배가 섬에 정박했을 때에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서 섬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교와 관련된 책자를 반포하는 일도 했다. 그러한 귀츨라프의 조선 선교는 로드 앰허스트호가 조선에게 통상요청을 거절되어도 포기 하지 않고 선교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두번째로는 토마스(Robert J. Thomas)선교사의 이야기이다.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최초의 순교자라고도 불리는 선교사이다. 그는 중국에서 통역으로 일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세관통역으로 일을 하던 도중에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선교사인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을 만나게 되었다. 윌리엄슨은 이미 개척선교사로서 중국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때에 윌리엄슨은 지부에 온 한국인 천주교인 두 명을 만났고, 조선 천주교인과 많은 이야기를 통해 그는 조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토마스도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윌리엄슨이 지부에서 만난 천주교인을 토마스에게 소개해 주면서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윌리엄슨은 1865년 9월 4일 토마스를 공회 권서의 자격으로 조선에 파송했다. 권서는 여러 곳에서 전도하고 성경을 보급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서해안 일대에서 지내면서 윌리엄슨이 공급해준 한문성서와 전도책자를 나눠주고 한국어도 조금씩 배웠다. 그렇게 그가 베이징에서 지내는 동안 조선에서는 병인박해라는 천주교인들을 대학살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자국 선교사들 9명이 처형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프랑스 대사는 함대를 파견시키기로 했고 토마스에게 통역으로 함께 할 것을 요청했다. 토마스는 그들과 함께 할 것을 받아들였는데 프랑스 함대가 토마스와의 약속을 뒤로 한 채 베트남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토마스가 있는 곳을 떠나버렸다. 이 일로 남겨지게 된 토마스는 실망이 가득차게 되었다. 그런데 토마스에게 또 다른 기회가 주어졌는데 이번 기회는 제너럴셔먼호라는 배가 통역으로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평양 감사 박규수가 국법으로 교역을 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리며 제너럴셔먼호에게 떠나기를 요청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끝까지 버티던 토마스와 많은 선원들은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었다. 


한글성서의 등장과 조선의 첫 개종자들  

윌리엄슨으로부터 토마스가 개신교 복음을 전파하려다가 순교했다는 것과 조선과 고려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로스(John Ross)는 중국어와 만주어를 공부한 후 고려문을 찾아갔다. 고려문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중간에 지어진 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선교 활동을 하려는 선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 상인들은 만나기 쉽고, 대화도 나누기 쉬웠으며 서양인들에게 적대적이지 않고 경계를 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어느날 윌리엄슨에게 50대 상인이 다가왔다. 그는 상인에게 한국어를 조금 배운 후 한문성서와 전도책자를 주었다. 의주 상인이 로스에게 받은 책을 백홍준에게 들고가 전해준 일이었다. 그 다음 백홍준이 자신의 지인들과 돌려 보았는데 그 가운데 두 명이 잉커우의 맥킨타이어(John McIntyre)에게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고 백홍준도 뒤따라 세례를 받았다. 로스가 한국어를 익힐 수 있는데에 도움을 준 이응찬은 로스의 선생님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양인에게 한국말을 가르친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하는 행위였기에 많은 이들이 로스의 한국어 공부를 꺼려했지만 돈을 넉넉하게 준다는 말에 이응찬은 로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맥킨 타이어는 한국인 구도자들을 위한 저녁집회를 만들어 개종자를 가르치게 했는데 이것이 조선 최초의 신앙집회였다. 그리고 기독교를 접해 들은 사람들의 전도로 한반도 최초의 개신교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로스가 고려문을 두번째 방문 하였을 때에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직후인 1876년 4월이었다. 로스는 이응찬과 서상륜, 백홍준등 한국인과 함께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번역이 완성된 것은 1879년 이었다. 그러나 성서 번역의 정확한 결과를 위해 반복적으로 여러번 고친 결과 마침내 1882년 3월 최종적으로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가 출간되었다. 이것이 최초로 한글성서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에 이어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인 예수성교전서가 1887년에  출간되었다. 순한글 성서가 나오게 된 것은 한글에 경건적 권위를 부여한 큰 사건이었다. 한글성서가 등장하면서부터 민중이 경전을 읽을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한글성서는 중요한 선교 수단 중 하나였다. 한글 복음서들의 출간에 기여한 사람들은 백홍준, 김청송, 서상륜, 류춘천이었다. 이들의 중심 지역은 고향이었다. 최초로 개신교 전도를 서울에서 활동한 이는 서상륜이다. 이들의 전도로 각 지역에서는 종교를 바꾸는 개종자가 생기고 여러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일본어성서도 생기기 시작했다. 일본 개신교가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을 때에 조선의 젊은 사람들이 일본에 견학하고 배우기 위해 많이들 일본에 갔고, 그 중 몇몇사람들이 개종하는 일도 일어났다. 가장 대표적인 개종자로는 이수정을 꼽을 수 있다. 이수정은 기독교에 많은 관심을 품고 있었다. 이수정이 역사적으로 한 일 가운데 가장 크게 주목받는 것은 미국 선교사들을 적극적으로 초청한 일이었다. 미국성서공회 루미스는 일본 책임자로 개종자인 이수정에게 성서번역을 요청했다. 1884년 2월에 이수정은 루미스의 요청에 의해 신약마가전복음서언해를 출간했다. 


조선 선교는 언제부터 시작 되었는가? 

조선선교는 일본과 중국에 진출했던 선교사들이 조선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 미국 개신교 선교는 제2차대부흥이라고 불리는 운동으로 인해 1812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남북전쟁으로 교회에는 분열이 일어났고 나라는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이 시기 미국에서는 부흥운동 이후 중산층들이 해외선교에 돈과 인력을 제공하면서 해외선교운동이 빠르게 성장하고 전문적이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처음부터 조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 조선선교에 관심이 없었기에 선교사들도 조선선교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조선에 관심을 가지게 된 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맥클레이(Robert McLay)였다. 그는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이며 그는 조선에서 천주교인들을 박해한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그 소문이 들려오면서 조선 선교를 가는데에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맥클레이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조선이 억지로 맺게 된 강화도 조약으로 나라의 문을 열 수 밖에 없었고 그는 준비도 없이 조선선교에 바로 투입되었다. 감리교 목사인 가우처(John Franklin Goucher)가 있었다. 그는 목사였으며 조선에 관심이 많았다. 이는 일본의 맥클레이에게 조선에 들어가서 선교 활동 여부를 알아봐 줄 것을 부탁했다. 이때 조선과 미국이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는 말이 들려오자 미국선교사들은 조선에 선교가 시급하다는 것을 본국교회에 빠르게 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맥클레이는 개신교 선교사로서 1884년에 처음으로 조선에 발을 들였다. 

김옥균이라는 인물은 맥클레이가 조선 선교에 두려움을 떨쳐주기 위해 옆에서 용기를 부어준 사람이었다. 김옥균은 갑신정변 전까지 일본을 수차례 드나들었었다. 김옥균은 맥클레이 말고도 녹스와 루미스 등 다른 미국 선교사와도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배웠다. 김옥균은 조선에 선교가 이루어지기 위해 힘쓰겠다는 말을 미국 선교사들에게 했다. 맥클레이가 서울에 도착하자 약속대로 김옥균은 그에게 청원서를 받아 고종에게 내밀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종은 승낙해 주었다. 조선선교의 간절한 마음과 절실함이 만나 조선에 선교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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